I. 머리말
II. 瓦當의 分布 樣相과 建物의 建立 順序
III. 初期 建物址群의 性格
IV. 伽藍의 整備 過程과 寺院 建立의 意義
V. 맺음말
요약
본고에서는 먼저 능산리사지에서 출토된 와당의 분포 양상을 분석하여 건립 순서를 추정하였다. 와당의 분포 양상과 더불어 배수시설의 축조 과정, 구조, 공반유물 등을 고려할 때 능산리사지의 가람중심부는 강당지와 그 부속 건물인 불명건물지Ⅰ, 공방지Ⅱ, 그리고 불명건물지Ⅱ, 공방지Ⅰ 등이 먼저 건립되고, 목탑지와 금당지, 중문지, 회랑지 순으로 건립된 것으로 생각된다. 강당지를 중심으로 한 건물지군이 먼저 건립된 사실은 초기의 건물지들이 불교 사원과 다른 어떤 특수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다음으로는 강당지를 중심으로 한 초기 건물지군의 성격을 추론하였다. 최하층 유구에서 550년 전후의 유물이 출토되었기 때문에 창왕명 석조사리감의 매립 연대인 567년 이전부터 기능한 것을 알 수 있다. 초기 건물지군의 구조는 집안 동대자 유적과 유사한 것으로, 강당지가 처음에는 제사 관련 시설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현 단계에는 아직 능산리사지 초기 건물지군의 성격을 단정하기 어렵지만, 능산리고분군, 특히 성왕릉의 축조나 성왕을 추복하기 위한 제사를 담당하던 사묘 혹은 사당 시설로 추정된다. 능산리 일대에 이러한 사묘 시설이 건립된 배경에는 능묘와 불교 사원의 결합 양상과 더불어 양나라에서 건너온 講禮博士 陸珝의 활동과 양무제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능산리 일대에 성왕릉이 축조된 경위와 가람중심부 건물지의 정비 과정 및 사원 건립의 의의에 대해 살펴보았다. 554년 7월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의 죽음은 매우 갑작스러운 사건이었다. 하지만 사비 천도 과정과 능산리 일대 유적의 배치 등을 고려하면 왕실의 매장지는 이미 지정되었을 가능성이 있고, 그런 점에서 초기 건물지의 상한 또한 554년 이전까지 소급될 여지가 있다. 능산리사지는 크게 3단계로 변화한 것으로 생각된다. 1단계는 550년대부터 567년 목탑 건립 이전까지로 초기 건물지군이 왕릉의 사묘로서 기능하던 단계이다. 2단계는 567년 목탑의 심초석 매립을 기점으로 사원 관련 시설이 들어서는 시기로 가람중심부 건물이 완성된다. 3단계는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전반부터 멸망기까지로 가람주변부에 대한 개발과 정비가 이루어진다. 이 단계는 가람중심부 각 건물지의 기능이 변화하고 가람중심부 주요 전각들의 보수가 이루어졌다. 567년은 위덕왕이 대내적인 체제 정비를 바탕으로 북조와의 교섭을 재개한 시점으로 나성 내부에 한정되었던 귀족 거주지의 확대와 더불어 도로 정비 등 사비 도성의 대규모적인 토목 사업이 시작된 해라 할 수 있다. 567년의 사리 공양과 목탑의 건립은 백제 왕실에서 ‘사리’가 갖는 상징성을 활용하여 능산리 일대의 신성성을 고양하고자 한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능산리사지의 정비와 변천 과정은 왕릉의 제사와 관련된 사묘 시설이 불교 사원으로 대치되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