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2. 신분고국과 6호 토광묘주의 마한 내 위치
3. 1ㆍ2호 석실분 조성 세력과 백제와의 관계
4. 맺음말
요약
본고에서는 원주 법천리에서 발견된 30기의 고분 가운데 3기의 고분과 출토유물을 중심으로 삼국시대 원주 재지시력의 역사적 형태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당시 원주에는 이 정도의 고분을 조성할 수 있는 계층과 그럴 수 없는 계층이 존재할 것이라는 다소 거친 계급구성을 해 두고, 고분 조성 층 가운데 신지와 신지가 될 수 있는 계층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런 전제하에 이들 신지층이 마한․백제와 어떤 관계에 있었는가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지금까지 논증한 법천리 고분군을 통해서 본 삼국시대 원주와 마한․백제와의 관계는 다음과 같다. 첫째, 3세기말~4세기 초의 것으로 추정되는 6호 토광묘에서 경질무문토기와 타날문 호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이 시기 한강 부근에 소재한 마한 소국 상호간에 활발한 문화교류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둘째, 이 과정에서 원주 법천리 고분군의 조성 세력은 마한 소국의 하나인 일화국이나 고탄자국의 신지층에서 계통이 이어지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 가운데 일화국이 원주일 가능성이 높다. 셋째, 4세기 중․후반에서 5세기 전반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1호분․2호분 석실분에서 출토된 청동초두와 양형청자는 근초고왕대 지방통치방식의 변화에 따라 이들 묘주와 조성 집단을 회유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는 곧 1~3세기 백제의 봉강체제 속에 일화구의 신지층이 존재하다가 4~5세기에 들어오면서 군현제 요소가 가미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넷째, 이렇게 보았을 때 마한․백제와의 관계라는 것은 우선 원주 재지세력 내부에 마한이라는 역사적 계승의식과 백제의 봉강을 받는 현실적 위치가 반영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듯 봉강의 주도권을 辰朝를 계승한 백제가 가졌다는 점에서 1세기 이후 5세기대까지는 삼국시대라는 연속선상에서 변화를 살피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생각한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