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유적의 현황
III. 유적의 특징
IV. 유적의 연대
V. 유적의 성격
VI. 맺음말
요약
수촌리 고분군은 토광묘, 횡구식 석곽묘, 횡혈식 석실분 등이 한 자리에 모여 있는 고분군이다. 그 동안 백제고분군으로 알려진 다른 여타의 고분군과 비교해 볼 때 특이한 현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더더욱 주목되는 것은 이렇게 서로 다른 묘제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는데도 불구하고, 고분 사이에 일정한 친연관계가 확인된다는 사실이다. 1호분과 2호분은 다 같이 토광목곽묘일 뿐만 아니라 부장유물이나 거리로 볼 때 부부일 가능성이 커 보인다. 4호분과 5호분 역시 다 같이 횡혈식 석실분인데, 한 사람씩만 피장되어 있고, 하나의 옥이 반분된 채 두 무덤에 절반씩 부장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양자의 친연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비록 묘제가 다르지만 수촌리고분군에 피장된 사람들은 결국 동일한 성격의 인물들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는데, 토광묘가 백제 중앙세력의 무덤은 아니라는 점에서 일단 수촌리지역에 기반을 두고 있던 백제의 재지세력이라고 판단된다. 그렇다면 횡구식 석곽묘와 횡혈식 석실분에 피장된 사람들도 수촌리지역의 재지세력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이들은 한결같이 金銅冠帽, 金銅飾履, 중국제 자기 등 당시로서는 최고의 유물들을 부장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고분의 피장자들은 수촌리지역의 수장층으로 생각된다. 아울러 시간이 지남에 따라 토광묘→횡구식 석곽묘→횡혈식 석실분의 순서로 묘제가 바뀌어 간 것으로 생각된다. 아울러 그 시기는 고분의 구조와 출토된 金銅飾履, 鷄首壺 등을 고려해 볼 때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초로 편년된다. 이 시기에 수촌리고분에 묻힌 사람들이 금동관모와 금동식리, 그리고 중국제 자기들을 고분 안에 부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 위세품을 백제 중앙으로부터 하사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그들이 그들 고유의 묘제라 할 수 있는 토광묘를 석실분으로 바꾸어가게 된 것도 역시 백제 중앙세력과의 밀접한 관련 속에서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구축해 오던 독자세력의 힘을 점점 상실하고 백제 중앙세력에 의해 재편되어 가던 백제 지방사회의 모습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는 자료라고 생각된다. 그런 점에서 수촌리의 고분군은 4세기~5세기대 백제의 중앙과 지방의 관계를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유적인 셈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