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론
II. 연화돌대문와당의 유적사례
1. 백제
2. 신라
III. 연화돌대문의 기원과 편년
IV. 청동개 연화돌대문의 의미
V. 결론
요약
법천리 고분군은 1973년 양형청자, 청동초두, 등자 등이 신고되면서 한강 유역의 백제시대초기 고분으로 알려졌다. 이는 백제의 對外交涉과 威信財의 하사 등을 통한 지방통치를 엿보이게 하는 것으로써 학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었다. 이곳에서는 모두 8기의 무덤이 출토되었는데 이중 횡혈식 석실분이 2기(1․3호), 횡구식 석실분이 3기(4․7․8호), 석실분이 2기(2․5호), 토광묘 1기(6호)등이다. 이중 6호인 토광묘는 3세기말~4세기 초로 편년되었고 나머지 석실묘 등은 4세기 초~7세기 초 및 고려시대까지 편년되었다. 아울러 고분군이 확인된 원주시 법천리 지역은 남한강과 접한 곳으로 늦어도 6세기 중엽 이후에는 신라의 영토로 편입된 곳이다. 따라서 법천리 고분군은 신라 眞興王의 영토 확장에 따른 신라문화 진출과 이전의 재지적인 백제문화가 혼재되어 있는 대표적인 고분이다. 8기의 고분에서는 각기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그 중 4호분에서는 人骨과 火葬된 인골, 그리고 靑銅蓋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靑銅蓋에는 突帶가 시문된 연화문이 조각되어 있어 당대에 유행하였던 蓮花突帶文 와당과의 친연성을 보여주고 있다. 아울러 人骨의 경우 火葬된 것이 출토되어 그렇지 않은 것과 葬制의 차이를 엿보이게 한다. 이는 시기 차에 따른 追加葬의 의미를 내포하는 것으로써 연화돌대문이 시문된 靑銅蓋와 친연성이 느껴진다. 본 고에서는 법천리 4호분에서 출토된 靑銅蓋 蓮花突帶文을 통해 이것이 6세기 4/4분기경의 와당을 모본으로 하여 제작하였음을 추정해 보았다. 아울러 고분 내에서 출토된 火葬 人骨은 진흥왕 이후의 불교정책에 의한 葬制의 변화로 파악하였다. 아울러 고분의 축조 연대를 4세기 말~5세기 초로 편년한 것과 관련하여 필자는 추가장의 가능성을 제시해 보았다. (연구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