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동리산성은 영평천과 포천천이 합류하는 하천로의 교차지점에 위치한다. 이들 하천로를 따라 남으로는 한강유역과 서로는 임진강유역, 북으로는 철원분지를 지나 동해안으로 진출입할 수 있는 요충지로, 관방유적의 입지조건으로서는 최적이라 할 수 있다. 부대시설로는 남문지와 우물지, 수구, 북동치성 등이 있다. 이 성은 3~5세기 백제 축조기, 5~6세기 고구려 남진기, 6~7세기 신라 북진기, 나말여초기 태봉국의 4시기의 변천과정을 거치는데, 그 중 백제와 신라에서 가장 활발하게 이용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백제한성기에는 성동리산성을 전방위성으로 하며 그 남쪽으로 반월산성과 고모리산성이 포천천을 따라 남북방형으로 배치되었다. 이들 성곽의 존속기간은 성동리산성과 주거유적, 고모리산성, 반월산성 등의 출토품을 비교하였을 때 3세기 중반에서 5세기 초반에 걸치고 있었다. 이런 편년자료를 통해 볼 때 백제에서는 석축산성의 축조가 진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에서는 성동리산성의 아래로 형성된 교통로를 이용하였으며, 그 세부적인 코스는 북쪽-철원-성동리산성-포천천로-반월산성-포천천로-천보산맥일원-왕숙천로․중랑천로-한강유역 등으로 연결된다. 이들 교통로와 관련하여 성동리산성과 주거유적에서 출토된 고구려나 그 계통의 유물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즉 한강유역의 아차산 4보루에서만 출토된 연속고리문토기편은 영평천유역의 성동리산성과 연결지울 수 있는 한 자료가 된다. 신라시대의 성동리산성은 영평천과 한탄강을 따라 배치된 고소성이나 주원리산성과 함께 전방위의 보조성으로 역할하였다. 나말여초기에는 현재 성동리산성에 전해지는 궁예관련전설이나 철원이나 포천지역의 전설들과 함께 분석하였는데, 이것이 단순히 전설로만 생각하기에는 너무도 구체적인 정황이 지역별로 담겨 있었다. 이처럼 관방유적은 기본 특성상 지속적으로 재사용되기 때문에 국적과 시기를 명확히 밝히는 데는 상당한 제약과 무리가 따른다. 그러나 성동리산성은 바로 아래의 마을유적에 대한 발굴조사가 있었고 하천로를 따라 남북으로 배치된 반월산성과 고모리산성 등 주변유적의 고고학적 성과가 있었기에 그 변천과정의 설정과 검토가 어느 정도 가능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다시 말해 관방유적은 종합유적으로, 마을유적과 무덤유적, 생산유적 등과 함께 유기적인 보완관계 속에서 연구되어야 만이 당시 사회상을 올바로 복원해낼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