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소산성에 대해서 『한원』에 사비시대 백제 王城으로 설명하고 있다. 왕성이란 왕이나 최고 권력자가 거주하는 공간을 의미한다. 나당연합군에 의해 사비도성이 함락되는 과정을 전하고 있는 중국 측 기록에도 부소산성은 ‘郭'(羅城)에 대한 상대적 개념인 ’城‘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부소산성 및 백제 왕궁지에 대한 종래의 인식이 수정될 필요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편, 왕성 아래쪽의 도성 내 시가지는 5부, 5항으로 편제되어 있었다. 사비도성 내에 5부, 5항이 분포하고 있었던 사실에 대해서는 관련기록이나 고고학적 자료로 볼 때 움직일 수 없는 사실임에 틀림없다. 다만, 그 편제 방식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은 점이 많다. 주지하다시피 사비도성내에는 한가운데에 금성산이 자리하고 있어 중국 도성에서 볼 수 있는 정연한 條坊制는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종래에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도성 내에 있었다는 5부, 5항에 대해서도 자연부락을 단위로 편제된 것으로 이해해 왔다. 5부에 각각 5항씩 모두 25항이 있었다고 보아왔던 것이다. 그런데, 사비도성내 5부, 5항의 편제 방식을 알려준 결정적인 자료라고 믿어왔던 궁남지 출토 목간은 실은 백제 때 제작된 것이 아닐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西部後巷’이라는 구절도 그렇지만 목간에 등장하는 ‘邁羅城’이라는 지명은 적어도 사비도성이 함락된 이후에 등장하는 지명이기 때문이다. 또한, 금성산 때문에 도성내 전체에 정연한 條坊制가 실시되기는 어려웠겠지만 적어도그 서쪽만큼은 도로망의 흔적이 보이고, 지금까지 조사된 유적들 또한 한결같이 일정한 방향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정 단위로 편제되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렇게 보면 사비도성은 북쪽에 왕성인 부소산성이 있고, 그 앞으로 官署들이 자리한 官署區가 있고, 다시 그 남쪽에 귀족들만의 공간인 5부와 일반 士庶人이 거주하던 5항이 편제되어 있었던 셈이다. 관서와 일반민의 거주구역을 구분하고, 다시 5부와 5항을 구별함으로써 엄격한 신분질서에 입각한 禮治秩序를 꾀하고자 하였던 것이 사비도성 축조의 목적이자 천도의 목적이었던 셈이다. 그런 점에서 사비천도와 더불어 백제가 周禮주의적인 정치이념을 표방하였다는 지적은 새삼 의미심장한 것으로 이해된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