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언
2. 사료의 검토
3. 탄현의 위치비정
1) 신라군의 출발지
2) 탄현의 위치
4. 황산벌의 위치
5. 결어
요약
여기저기 단편적으로 남아 있는 기록과 부흥운동기 백제 부흥군의 군사활동을 종합해 볼 때 당시 신라와 백제 사이의 교통로는 삼년산성-옥천-대전-진현성-두마-연산으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 생각된다. 자연히 문제의 炭峴은 옥천과 대전 사이의 경계지점에 있었을 것이다. 마침 이곳에는 대동여지도 遠峙라고 표현되어 있는 고개가 있다. 그런 점에서 이 遠峙야 말로 성충과 흥수가 그토록 강조했던 炭峴이었던 것으로 믿어진다. 그래야만 성왕이 관산성으로 쳐들어간 이유도 자연스럽게 설명이 된다. 이곳을 돌파한 신라군은 대전 남부를 거쳐 계룡산과 천호산 사이에 형성된 構造谷을 통과한 다음, 연산평야로 나아갔던 것으로 보인다. 자연히 이러한 신라군의 진격로를 저지할 수 있는 곳은 현재의 연산면 연산리 일대 밖에 없다. 이곳을 벗어나면 부여까지 一望無際의 평야가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마침 이곳은 후백제군이 왕건의 고려군을 맞아 최후의 전투를 벌인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 자리하고 있는 開泰寺와 天護山은 불분명한 황산벌의 위치를 방증해 줄 수 있는 중요한 단서들이다. 시간이 지났어도 황산벌의 전략적 중요성은 변함이 없었던 셈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