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금산지역의 산성 현황
III. 금산지역 백제산성 도출
IV. 금산지역 백제산성의 기능과 역사적 의미
V. 맺음말
요약
본 연구는 금산 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산성자료를 통하여 백제와 신라의 대립과 이에 따른 산성의 기능을 살펴보고 산성이 가지고 있는 종합적인 성격을 통해 주변의 유적과 문헌자료를 더하여 당시의 시대상황을 유추해 본 것이다. 금산 지역에는 총 20개소의 산성이 분포하는데, 백제산성이 14개소에 이른다. 이 14개소의 백제산성 중에 수당리 토성 1개소를 제외한 나머지 13개소의 산성은 모두 석축산성으로, 初築 시기에서는 얼마간의 차이가 있을지 모르나 모두 백제시대말기까지 공존하면서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운용되어져 왔다. 이들 석축산성은 분포를 통해 그 기능과 특징이 구별되는데, 그 중에서도 금산읍과 추부면을 경계로 7개소나 되는 산성이 밀집 배치되어 있는 것이 주목된다. 현재의 추부면과 금산읍의 경계지점이 그 만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구분현상은 문헌기록이나 고고학 자료를 통해서도 확인되는데, 우선 문헌기록을 살펴보면 백제시대 금산 지역은 추부면의 伉山縣, 금산읍은 進伋乙郡으로 나뉘고 있어 행정적으로도 분리되어 있었음이 증명된다. 또한 고분의 분포를 통해서도 지역적인 구분이 더욱 더 뚜렷하게 확인되는데, 추부면 지역에서는 6세기 중후반의 신라 장대리 고분군만이, 금산읍 지역에서는 백제와 가야의 고분만이 조사되고 있다. 특히 장대리 고분군은 6세기 중반 성왕의 관산성 전투 패전 이후 신라세력이 추부면 지역까지 진격한 증거로 이해되고 있어, 추부면 지역이 신라세력의 영향 하에 있었음을 확인해주고 있다. 추부면과 금산읍을 경계로 한 백제의 대립양상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삼국시대 말기 영동군 양산면으로 비정되는 조천성 전투(655)를 통해 볼 때 금산읍 지역은 변함없이 백제 동계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금산 지역은 동계지역으로서의 의미만 아니라, 낙동강 유역의 가야세력을 잇는 중요한 교통로서의 의미도 지니고 있다. 이러한 교통로는 의자왕 2년 백제세력의 대야성 공취로 남반부에서 신라세력을 압박할 당시 백제 중앙에서 합천․낙동강유역과 연결하는 최단 코스로 이용되었음이 짐작되는데, 그 동안 금산지역이 탄현으로 비정되는 것도 백제나 신라가 서로를 침공하기 위해서는 금산 지역을 반드시 거쳐야 하는 지리적인 중요성을 증명하고 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