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론
II. 웅진교의 가설 장소
III. 임류각의 위치
IV. 왕궁의 위치
V. 결론
요약
백제가 지금의 서울 지역인 漢城을 상실한 후에 천도한 곳이 웅진성이었다. 웅진성이 一國의 首都로서 기능하기 위해서는 王宮을 비롯해서 官廳과 民家 그리고 市場과 橋梁 그리고 墳墓群이 조성되기 마련이다. 이 가운데 權府의 핵심 시설이 왕궁인 것이다. 백제가 웅진성에 도읍하던 시기의 왕궁의 위치는 이 시기를 연구하는 데 기본적인 전제가 된다. 웅진 도읍기의 왕궁의 소재지에 대해서는 2가지 견해가 맞서고 있다. 공산성 안에 소재했다는 설과 공산성 바깥에 소재했다는 견해이다. 아울러 왕궁과 연계된 건조물인 임류각의 소재지에 대해서도 검토가 필요하였다. 나아가 웅진교의 위치를 확인함으로써 웅진도성의 규모와 도시 체계를 엿 볼 수 있게 된다. 웅진도성의 왕궁 파악의 관건으로서 임류각의 소재지 파악에 부심한 결과 ‘流’ 字銘 기와가 출토된 공산성 안의 특정 건물지를 임류각지로 비정하였다. 이와 연동하여 임류각지의 서편 쌍수정 광장이 왕궁지로 추정되었다. 그런데 ‘流’ 字銘 기와는 여러 곳에서 출토되었을 뿐 아니라 일제 때 공산성 동편에서도 출토되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현재의 임류각지는 통일신라 때 건물지로 추정되고 있을 뿐 아니라 ‘流’字銘 기와 역시 백제 기와도 아닌 만큼 임류각지 비정은 가능성이 없다. 그 밖에 諫臣의 上疏와 관련해 동성왕이 궁문을 닫아걸자 임류각의 위치를 궁안으로 단정해 왔다. 그러나 궁문은 역사적으로 신하나 백성들이 의견을 전달하는 공간이었기에 궁문을 닫아 건 기사가 나왔을 뿐이었다. 임류각이 궁성 안에 있었다는 증거가 되지 못하였다. 그럼에 따라 임류각지에 근거한 쌍수정 광장설은 근거를 잃어버렸다. 임류각의 위치 파악은 앞으로의 과제이지만, 이름 그대로 ‘臨流’와 부합될 있는 공산성 바깥의 금강변이 적합해 보인다. 이와 관련해 輕部慈恩의 연구 성과는 충분히 참작할 값어치가 있었다. 쌍수정 광장의 적심석 건물지는 2棟밖에 되지 않을 뿐 아니라 공간마저 협소한 초라한 모습이다. 더구나 왕궁 남쪽에서 大閱을 했다고 하지만 쌍수정 광장 남쪽은 공간이 전혀 없는 관계로 왕궁이 아님을 逆으로 증명해 주고 있다. 그 밖에 왕궁이라면 반드시 존재했어야 할 담장과 宮殿 入室과 관련한 階段의 존재도 확인되지 않았다. 결국 왕궁지는 산성과 평지 궁성의 결합 관계를 놓고 볼 때 공산성 남쪽 일원으로 비정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 곳에 건물이 찬 관계로 고고물증은 확인되지 않지만 대형 초석의 존재를 비롯한 물증도 이미 확인된 바 있다. 그런 관계로 차후의 발굴이 진행된다면 그 윤곽이 드러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웅진도성의 정비와 관련해 웅진교라는 교량은 ‘웅진’의 용례와 고구려의 경우를 비롯해 그 필요성을 놓고 볼 때 곰나루와 그 건너편을 연결하는 木橋로 파악되었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