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침미다례 관련 기사에 대한 제견해의 검토
Ⅲ. 고고학적으로 본 침미다례의 위치
1. 침미다례의 기존 비정지에 대한 고고학적 검토
2. 고고학적으로 본 침미다례의 위치
Ⅳ. 맺음말
요약
침미다례는 백제의 마지막 마한 병합 과정에 있어 극복되어야 할 가장 중요한 세력으로 인정되고 있지만 그 위치와 병합 시기에 대해서는 견해 차이가 많다. 고고학적으로 보면 침미다례의 위치는 전남 고흥반도 일대로 추정되며, 병합 시기는 6세기 초로 판단된다. 침미다례는 『일본서기』에 남만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백제에 비호의적인 남쪽 세력이기 때문일 것이며 당연히 주변 세력과 구분되는 고고학 자료를 남겼을 것으로 믿어진다. 따라서 침미다례는 마한의 가장 남쪽 지역 가운데 고고학적으로 다른 지역과 뚜렷이 구분되는 자료들을 통해 그 특이성이 증명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은 점을 감안하여 보면 전남의 고흥반도 일대가 주목되지 않을 수 없다. 고흥반도 일대에는 21개소에 달하는 고분(군)이 존재하며 금동관과 금동신발이 출토된 안동고분과 전형적인 남해안식 석실을 가지고 있는 동호덕 고분이 대표적이다. 이와같은 고분들은 백제식 석실묘나 영산강식 석실묘와는 다른 구조를 가진 것으로서 5세기말-6세기초까지 발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헌기록 가운데 6세기 초에 해당하는 『양직공도』에는 백제의 부용국들이 나열되어 있는데 이는 당시 백제 주변에 소규모의 반독자적인 세력들이 6세기 초까지도 존재하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고흥반도 일대는 남해안 연안항로의 길목에 해당하는 지리적인 이점을 바탕으로 성장하였고 백제뿐만 아니라 왜 등 주변세력과 교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금동관이나 금동신발과 같은 범백제계 위세 품은 백제와의 밀접했던 관계를 말해주며 왜 계통의 매장주체시설과 부장품들은 왜와의 관계를 반영하고 있다. 이 지역은 백제와 왜 사이에서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면서도 어디에도 구애되지 않은 독자세력으로 남고자 하였을 것이며 이로 인해 남만으로 표현되면서 백제의 병합 대상이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