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서기』에 崇峻天皇 원년(588), 백제로부터 승려와 함께 불사리봉헌․사공․경반박사․와박사․화공 등의 기술자가 파견되었다는 기사가 있다. 여기에 일본 최초의 본격적 사원인 비조사의 조영이 시작되었다. 백제 사비기에 공식적인 외교관계 속에서 백제에서 많은 생산기술자가 來朝한 것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또한 이전에도 백제와 왜의 외교관계 속에서 생산기술자의 왕래가 있었다.
그러나 본고에서 강조하고 싶은 점은 백제 사비기 이전의 중앙과는 선을 긋는 일반층이 활발한 왕래를 하여 양 지역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고지의 생산기술이 그대로 도입된 것이 아니라 그 주변기술을 살리며 고지와는 다른 생산을 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사람들이 일본에서 초기 군집분의 조영이나 수혈식주거의 생활양식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된다. 한반도에서 지리적으로 가까운 북부구주에서는 더욱 많은 백제계 토기가 유입되었고, 일반층이 다양한 생산활동을 전개되고 있던 사실이 있다. 그 사람들이야 말로 일본문화의 기층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담당하였다고 생각된다.
권오영은 필자와 같은 검토를 통하여 일본 근기지방에 한성함락을 계기로 다종다양한 지역의 백제계 일반층이 유입되었다고 보았다. 거기에는 백제 중앙의 일정한 의지가 내포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근기지방에서는 이 시기의 도래계 집단의 대부분은 백제 중앙으로 거리적으로나 계층적으로도 완전히 유리한 일반층이었다. 일본에서 고분시대에 이러한 백제계 도래집단은 각지에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비조시대 이후 서서히 그 내역을 포함하여 정권에 장악되고 재편성되었다고 생각된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