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고구려의 고분문화
Ⅲ. 백제의 고분문화
Ⅳ. 고구려ㆍ백제 고분문화 현황과 전개와 관련된 의문점 - 맺음말에 대신하여
요약
백제와 고구려 묘제와 대비할 경우 백제 건국기 정황을 대변하는 백제 적석총 문제를 제외하면 고구려 묘제와 백제 묘제를 대비하여 설명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오히려 백제의 묘제는 한반도 중서부에 자리하면서 삼한 토착사회의 묘제를 아우르고 여기에 새로운 묘제를 가미하여 나름의 백제적 묘제로 정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백제 초기 건국주체세력이 고구려의 남하집단이란 점, 한강유역에 고구려의 묘제와 비슷한 적석총이 존재한다는 점은 검토가 필요한 것이다. 서울강남을 포함한 북한강․남한강유역에서 발견된 적석총을 고구려식, 백제식, 말갈식으로 나누고, 고구려식 적석총의 강남지역 등장을 백제의 건국시기로 보고 있다. 이렇게 되면 석촌동 1호분이 가장 빠른 단계의 고구려식 적석총이 되는데, 그 시기는 3세기 중엽 경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백제의 건국자 집단이 고구려와 관련이 있다는 것은 이미 다 아는 사실인 만큼 강남지역의 적석총을 백제의 건국과 관련지우는 데에는 이론이 없다. 다만, 그렇게 되면 사료상에 등장하는 沸流로 대표되는 집단의 존재가 무엇인가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더불어 사료상에는 고구려와 함께 부여와 백제와의 관련성도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만큼 이에 대한 해명도 필요해 보인다. 물론, 즙석분구묘와 沸流와의 관련성을 상정하기도 하는데, 그렇게 되면 비류가 온조의 형으로 나타나고, 史書에 따라서는 비류를 시조로 보는 것도 있는 만큼 결국 백제의 실질적인 건국은 즙석문구묘의 등장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또한,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백제와 고구려와의 관련성만큼이나 백제와 부여와의 관련성도 추구하고 있는데 비해 백제와 부여와의 관련성을 부정하고, 단순히 고구려와의 대등함을 강조하기 위한 명분에서 백제 지배세력이 부여계를 표방하였다는 견해도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백제 왕실이 扶餘氏를 자칭하고, 사비로의 천도 후 국호를 南扶餘라고 하였던 사실을 단순히 명분을 살리기 위한 제스처로 보기에는 사안의 중요성이 너무나도 크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점은 결국 백제의 건국을 적석총과 관련지으려는 생각, 다시 말해서 백제와 고구려의 관련성만을 강조하고 부여와의 관련성을 애써 외면하려고 한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