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언
II. 백제의 웅진천도
III. 수촌리 고분군의 의미
1. 수촌리 고분군의 내용
2. 수촌리 고분군의 묘제적 특징
IV. 수촌리 고분군과 백제의 웅진천도
V. 결언
요약
수촌리 유적은 청동기시대의 유적과 백제시대의 유적이 복합되어 있는 공주시 의당면 수촌리에서 2002년에 발견된 유적이다. 이 유적 중에서 주목되는 것은 독립된 구릉지역에서 조사된 6기의 백제 분묘이다. 물론 조사범위가 한정되어 분묘 6기만이 조사되었지만 유적의 범위는 주변으로 크게 확대되는 것인데, 규모는 어떠하든간에 6기의 분묘의 유구나 유물의 내용은 백제고고학만이 아니라 백제사의 해명에 폭발적 정보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즉 6기의 분묘는 토광묘, 석곽묘, 석실분이란 서로 다른 묘제가 하나의 단위집단으로 존재하면서 계기적 변천과정을 보여주고, 여기에서 출토된 유물은 각종의 금동관모 식리, 환두대도, 살포, 중국제 자기 등으로 구성되어 있어 백제분묘 출토품으로는 최고급품으로 피장자의 권위가 상당하였음을 그대로 입증한다. 이 수촌리 유적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그동안 백제사에서 미궁으로 남아 있던 백제의 중앙과 지방의 관계, 특히 4~5세기대 백제 지방사회의 여러 집단들이 어떤 형태로 존재하였을까라는 문제에 대한 해명의 기회를 얻었다고 본다. 즉 이시기 백제의 지방사회는 비교적 독자성을 지닌 수장들에 의해 장악되어 있으면서 이들 수장들은 백제중앙 정부로부터 위세품을 하사받아 이를 배경으로 그들의 권력을 유지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중앙정부는 이들 수장을 통해 전국을 장악하였던 것으로 판단할 수 있게 되었음이 그것이다. 한편 수촌리 유적은 백제의 두 번째 도읍지였던 웅진지역과 가깝게 자리한다. 물론 이 유적은 도읍지인 웅진에 포함시키기는 어렵고 오히려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는 유적이다. 그런데 주지되듯이 백제의 웅진천도에 대해서는 고구려의 침략에 의한 천도라는 일반적 인식만이 대세를 이루듯이 배경이나 과정에 대한 이해는 미답의 상태에 있었다. 다만 웅진지역의 고고학 자료를 토대로 천도가 왕실의 자의적 행위보다는 지방 세력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고찰가지 이루어졌지만 왜 웅진이었는가에 대한 분명한 논거는 마련하기 어려운 상태였는데 수촌리 유적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백제의 웅진천도는 이들에 의해 주도된 결과라는 판단이 가능하게 되었음을 살펴보았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