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세기 이전 백제에는 두 가지 형태의 성이 있었다. 하나는 3세기 후반 이후 군사요층지에 축조한 산성이었다. 주로 하천을 건너기 쉬운 곳이나 고갯길 등 소수의 병력으로도 적을 방어하기 유리한 곳에 산성을 쌓았다. 다른 하나는 소국 중심지에 축조되었던 토성이었다. 이 두 가지 형태의 성곽은 각각 축조 배경과 성격에서도 차이가 있다. 산성의 경우 군사적 목적이 강하는 소국 중심지의 평지 토성인 경우에는 행정적인 의미가 컸다. 4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두 가지 형태의 성의 기능이 합쳐진 새로운 형태의 성이 등장하였다. 이때 백제는 고구려와 예성강 유역을 중심으로 치열한 전투를 펼치게 되었다. 백제가 고구려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지방통치를 정비할 필요가 있었다. 그 방법으로써 곳곳에 축성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대체로 지방의 인구밀집지역이나 교통의 분기점에 석축산성이 축조되었다. 국가적 차원에서 축성을 통제하고 규격화 하였다. 이러한 산성은 군사와 행정 기능을 통합한 거점산성으로 군사력을 바탕으로 주변 촌락들을 장악하고 통제하였다. 4세기 후반이후 백제 지방 통치의 기본 단위가 되었다. 신라가 진출하였을 때도 그대로 이어져 신라의 군현성으로 활용되었다. 거점산성 주둔군은 중앙에서 파견되었다. 평상시 약 100여명으로 추정되지만 전시에는 병력이 증원되었다. 산성 주둔군의 식량은 주변 촌락으로부터 공급받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평시에도 촌락의 수취에 간여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농업생산력을 높이기 위하여 철제 농기구를 촌락에 공급하는 역할도 하였다. 산성이 촌락 지배의 중심으로 수취와 농업생산력의 확대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필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