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시기별 고적조사사업의 내용
Ⅲ. 부여 지역의 고적조사 재개 배경과 신궁 건립
Ⅳ. 맺음말
요약
본고에서는 백제 고지에 관한 고적조사사업의 전개 과정을 시기별로 구분하여 그 흐름을 이해하고, 1930년대 이후 부여 지역의 절터 발굴이 집중적으로 실시된 배경을 추적해 보았다.
백제 고지의 고적조사사업은 크게 4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1기는 1909년 關野貞일행의 고적조사로 광주, 공주, 부여, 익산 등 백제의 都城址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2기는 1916년 「보존규칙」 시행 이후 가장 광범위하고 조직적인 발굴조사가 실시되는데, 1기의 도성지에 더하여 나주 지역에 대한 조사가 추가된다. 3기는 1920년대 이후재정적ㆍ행정적인 이유로 발굴조사는 줄어들지만, 발굴보고서의 간행과 같은 整理와 유적의 保存이 중심이 된다. 4기는 朝鮮古蹟硏究會가 설립된 이후 1935년부터 扶餘 지역의 寺院址에 관한 조사가 집중적으로 실시된다.
1930년대 중반 이후 백제 고지의 고적조사는 고분이 아닌 부여 지역의 절터가 중심이 된다. 이러한 방향 전환은 일본 학계의 飛鳥文化에 대한 관심의 증대, 재단법인 부여고적보존회의 활동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일본학계의 현안이었던 飛鳥文化의 원류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백제 사원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었다. 1929년 재단법인이 된 부여고적보존회는 大坂金太郞를 중심으로 조직적으로 활동하면서, 부여를 일본과 인연이 깊은 백제의 舊都로 인식시키고 관광명소화하는데 기여한다. 그러한 대내외적인 활동 결과 부여는 일본과 인연이 깊은 곳으로 선전된다. 그 후 조선총독부에서는 1939년 부여에 神宮을 조영하고 神都를 건설하게 되며, 부여는 內鮮一體의 靈地가 된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