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문화가 부여-고구려계통의 문화발전을 점차 탈피하여 백제문화로서의 특성을 지니게 되는 것은 웅진천도 이후 사비시대였다고 하겠다. 비록 중국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무령왕릉의 묘제로 보아 중국남조계통의 직접적 영향이 공주시대에 국한되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성왕 이후에 한반도 서북부의 지리적 조건을 크게 활용하여 백제사상의 문화결실기를 현출한 것과 같다. 동시에 고구려가 한강남북유역에 정착함으로써 한성시대의 백제문화는 고구려문화와 일체화를 이루게 된 것으로 보인다.
또 백제후기는 대신라전에 주력하는 삼국통합전쟁을 어려운 상황 속에서 수행하게 되지만 부여 특히 익산지역 등을 중심삼아 수준높은 문화발전을 도모해 간 것으로 미루어 보면 상술한 바와 같이 오히려 후기에 백제 특유의 문화발전은 이룩한 것으로 주목해도 좋을 것이다. 물론 사회기층 문화와의 결합이 사비시대 이후에야 가능한 것도 사실이지만 이러한 것들은 사비천도 이후 재지세력과 중앙과의 관계나 익산지역을 중심으로 한 문화적 성과 그리고 마한 이래 기층사회의 실상이 구체적으로 밝혀질 때 보다 정확한 결론이 나오리라 생각된다.
한편 고구려에 있어서도 원래 평양천도보다 훨씬 전부터 부분적이지만 한반도 북부에서 생활을 영위해 왔었고 또 천도 후에 있어서도 정치 경제 기타 제도면 외에 문화사상적 변화의 추적까지는 그렇게 확연하지 못한 어려움이 따른다. 그러나 대체로 고구려는 북으로 塞外民族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 그 기마민족문화를 가져오고 독자적인 동이족문화에다 중국 농경문화를 소화 활용하면서 한반도 중심으로 개화시켰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평양천도 후에는 남진정착을 완수함으로써 고구려의 제반문화가 전체적으로 농경정착적 성숙을 보기에 이른 듯 하거니와 이와같은 고구려문화의 성격전환은 당연히 앞으로 보다 많은 자료의 개발과 연구성과의 축적을 기다려 해명되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우리는 일단 고구려문화가 후기에 들어 한반도 중심적 특성을 더욱 갖게 되어 이점은 민족사 내지 민족문화상에 동질적 의의가 막중한 것을 강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민족은 기본적으로 한예맥계의 동이족으로서 동일한 농경집약적 생산활동을 영위하여 그 결과 농경정착문화를 이룩함으로써 동질의식 내지 同文化意識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삼국의 한반도 분점쟁탈은 실상 통합 지향의 과정이었으며 그 속에서 삼국이 일련의 관계성을 더욱 확보할 수 있었다고 하겠다. 그러면서도 삼국 각자의 독자성이 문화요소에 그대로 반영되고 결국 통일민족문화 속에 용해되어 일체화를 이루게 된 것은 더욱 값진 특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