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옥천지역의 산성
Ⅲ. 옥천지역 산성과 보루 수습 유물의 양상
Ⅳ. 옛 교통로와 산성 및 보루의 배치관계
Ⅴ. 옥천 지역 관산성 관련 유적의 보존 방안
Ⅵ. 맺음말
요약
관산성전투와 관련된 산성을 조사하고, 아울러 땅이름과 전설로서 관련될 수 있는 내용을 소개하였고, 교통로에 대해서도 살폈다.
첫째로 이제까지 조사된 성터와 보루터보다 많은 유적이 있음이 확인되었다. 둘째로 과거 옥천군 지역에 존재했던 신라의 아동혜현과 소리산현의 치소가 오늘날의 화학리산성과 이원리산성일 것임을 추론하였으며, 관산성은 옥천읍의 삼양리토성․서산성․삼성산성의 세 성터로 범위를 좁혀 볼 수 있게 되었다. 셋째로, 조사된 성터 가운데 군서면의 성티산성은 문터의 형식이 백제후기 양식이므로, 그보다 서쪽의 닭재에 있는 계현성을 지나 대전의 보문산성 문터와 구조적으로 같은 계통임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양식의 성터는 동성왕 때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많으며, 전설상으로도 뒷받침 되는 바가 있다. 따라서 부수적으로 백제의 탄현이 오늘날의 옛 관산성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는 유력한 근거이다. 넷째로, 옥천군 옥천읍에서 군서면 월전리로 가는 길목에는 전쟁과 관련된 지명이 모여 있으며, 동북쪽 고리산 위에는 여창이 쌓고 있었다고 전해오는 성터와 보루들이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다섯째로 지명에 있어서 백제 성왕의 전사지로 지적되어온 구진벼루, 혹은 구전, 구전벼루가 구진(狗津)이나 구천(狗川)으로 표기될 수 있었을 것을 문제로 제기하였으며, 숯고개와 개골․갯골․객골로 표현되는 지역도 양쪽에 할미성과 할배성의 관계로 설명되는 교통로를 막는 요충으로서 가능성이 있으나 객관적 의미에서 근거가 약하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었다. 여섯째로 고대의 교통로와 전설, 산성의 성벽 등을 통해서 백제와 신라의 국경형성을 살필 수 있었다. 일곱째로 백제의 관산성 침공에서 한때 신라가 불리하였다고 하나 이 지역은 이미 앞선 시기부터 신라의 세력권에 들어 있었고, 최근 이와 관련된 신라고분군이 확인되었다는 점에서 재고를 요한다.
한계점으로는 범위를 확대하여 고찰하지 못했다는 점과 전설과 교통로, 땅이름의 조사와 분포 또한 이들 외곽지역과 함께 행하여질 때 보다 객관적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개발, 보존이라는 명제를 두고 우선적으로는 역사교육의 현장으로서 탐방로 이외의 방안을 생각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탐방로의 경우도 각 지역으로의 연계문제 등은 숙제로 남는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