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서는 웅진시대와 사비시대의 백제왕도의 모습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왕성이란 왕이 평상시에 거주하기 위해 축조한 성곽을 말한다. 왕도란 그러한 왕성을 포함한 일정 공간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런 왕도에 시가지 전체를 에워싼 나성이 축조되어 있는 것을 도성이라 한다. 결국 왕도와 도성은 도읍지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그러한 도읍지에 나성이 있으면 도성이 되고, 없으면 왕도라 볼 수 있다. 시가지 전체를 에워싸는 나성이 있는 사비는 ‘도성’이라 부를 수 있지만, 나성이 없는 웅진성은 ‘왕도’라고 부르는 것이 옳은 표현이라고 믿는다.
도성 연구에서 구조에 대한 이해는 우선적으로 필요한데, 이에 대한 기록이 없고, 현재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는 만큼 발굴조사를 통한 이해도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 점에서 천도의 목적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천도의 목적을 알면 도읍지의 구조를 짐작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방어에 유리했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주를 이루었다. 그런데 최근에 수촌리고분의 발굴을 통해 방어상의 유리함 때문만이 아니라 수촌리고분을 남긴 강력한 재지세력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해석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의문이 남아있지만 막연히 방어의 유리함만 강조했던 이전의 주장보다 자연스러워진 것은 사실이다. 공산성의 축조시기에 대해서도 이견이 있지만 일단은 천도 후에 공산성을 쌓았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각된다. 왕궁의 위치에 대해서도 공산성 안과 밖의 주장이 팽팽하다. 현재까지의 조사자료로 볼 때 공산상의 쌍수정 앞 광장이 가능성이 높은 것은 사실이다. 웅진교의 경우 시가지가 제민천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으로 양분되어 있어, 제민천을 가로지르는 다리였다고 생각된다. 아울러 위치는 대통사 근처, 『공산지』에서 말하는 대통교터가 그곳이라고 믿어진다.
웅진에 도읍하였던 백제는 사비로 천도하였다. 천도와 더불어 나성이 새롭게 등장함으로써 ‘도성’에 걸맞은 구조를 하게 된다. 우리 역사상 최초의 나성이 등장한 셈이다. 왕궁의 위치는 사비도성의 북쪽인 구아리, 관북리, 쌍북리 일대에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단서가 없는 만큼 『한원』에 부소산성을 ‘왕성’이라고 소개한 사실을 주목하여 부소산성 역시 다른 후보지들과 더불어 검토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도성의 구조를 살펴보면 성왕은 천도를 통해 도성의 맨 북쪽에 왕궁과 관청을 배치하고, 남쪽으로는 일정한 원칙하에 귀족과 평민들이 거주하는 5부와 5항의 거주처를 마련하며, 다시 도성의 한가운데에 사원을 배치함으로써 세속과 종교를 넘나드는 절대군주로서의 모습을 과시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연구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