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百濟의 對中交涉
Ⅲ. 中國 北齊, 北周, 隋, 初唐 佛像樣式의 전개
Ⅳ. 百濟 7세기 불상
Ⅴ. 新羅 7세기 불상양식과의 비교
Ⅵ. 맺음말 : 百濟 7세기 불상양식의 특징
요약
백제 7세기 불상양식의 특징을 대중교섭의 상황과 연계하여 규명하였다. 이를 정리하자면, 첫째, 백제의 7세기 불상양식에는 앞 시기에 남조 불상양식을 바탕으로 성립한 전통양식이 마지막 예인 익산 연동리 석불좌상까지 지속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둘째, 태안과 서산마애불상, 그리고 7세기 백제 반가사유상에서 북제 불상양식의 수용을 살필 수 있다. 이는 위덕왕 14년(567) 이후 그동안의 남조 중심의 외교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북조 국가와의 교섭에 나선 결과로 보인다.
셋째, 따라서 태안과 서산의 마애불상은 그동안 마애불이라는 이유로 쉽게 비교되어 왔던 산동지역의 隋代 석굴사원의 불상들과 양식상 직접 연결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諸城出土 불상이나 淸州 龍興寺址出土의 시대가 다소 올라가는 東魏 내지는 北齊代 불상들과 관련을 보인다. 이들 불상은 모두 남조 梁代의 불상양식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의 맥락을 갖고 있다.
넷째, 백제의 隋樣式 수용은 7세기 금동불에서 본격적으로 볼 수 있으나, 화려한 수양식을 반영한 당시의 대표적 불상은 왕흥사의 본존불이었을 것이다. 이 금동불들은 주로 하북성, 산동성 등 北齊系의 隋佛像들과 관련을 보이며, 이들 불상양식의 특징인 단순성을 받아들여 생략화, 추상화의 경향을 반영하며 백제미술의 예술성을 완성하고 있다.
다섯째, 백제는 마지막까지 국운을 불교에 의지하여 익산에 미륵사를 창건하는데, 이 시기의 상황을 전하는 상이 익산 연동리 석불좌상이다. 백제 최후의 상으로 수대 후기의 여래좌상 양식을 반영하고 있다.
여섯째, 백제 불상 중에는 일본에 건너간 규암출토의 금동보살입상만이 수말당초의 양식을 반영하고 있는데, 이처럼 백제의 7세기 불상 중에는 대당교섭이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초당양식을 반영한 상은 극히 드물고 이는 삼국 모두가 공통이다.
일곱째, 반면에 신라의 7세기 불상들은 장안을 중심으로 한 北周계통의 隋佛像의 영향을 보여서 백제 불상과 구별되며, 적극적인 對隋, 對唐交涉의 결과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로써 백제 7세기 불상양식을 총괄해 보면, 초기에는 북제와 수의 불상양식을 수용하여 새로운 양식을 주도해 나갔으나, 국가의 존위가 위급해지며 당과의 교섭이 원만하지 않은 가운데 보다 새로운 중앙의 수, 당 양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백제의 불상 조성은 삼국 중에서 가장 긴 역사를 이루었고, 다양하고 수준 높은 양식을 창출하였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