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일정한 정치적 통합을 이룬 집단들 사이에 정치적 이해관계를 해결하기 위한 조직적인 무력 투쟁으로서, 그 결과에 따라 고대 사회의 계급발생과 국가형성이 촉진되기도 함은 물론 국가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근간이 되기도 한다. 중서부지역에서 출토된 마한과 백제의 무기류는 短兵器로는 鐵刀, 長兵器는 鐵矛, 원거리 요격 무기로는 弓矢의 3종류가 주종을 이루며, 마구류는 등자와 재갈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들에 대한 고고학적 양상을 검토한 결과 그 기능 및 형태 변화에 따라 크게 3단계의 변천과정을 거쳤음을 알 수 있었다. 1단계는 3세기 대 무렵으로서, 길이 40~50cm 내외로 길고 단면이 렌즈형이나 편능형으로 비교적 얇아 刃兵과 刺兵의 기능을 겸하는 基部 直基形의 철모가 무기체계의 주종을 이루었던 것으로 파악되며, 漢과의 접촉을 통해 基部 燕尾形의 철모도 유입된다. 鐵刀 특히 大刀는 素環頭刀만 제작되고 있는데, 환두도의 위신재적 성격으로 보아 보편적 무장으로 이용되었는지 여부는 검토의 여지가 있다. 이에 따라 마한과 이들 지역의 무기체계가 유사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 당시 구체적인 군사조직 형태나 단위, 상비군화여부 등은 아직 잘 알 수 없다. 2단계의 가장 특징적인 것은 봉부 단면이 매우 두터운 능형이면서 길이가 20cm내외로 매우 짧은 基部 燕尾形의 철모가 발달하는 점이다. 이는 철모 본연의 찌르는 기능이 훨씬 강해진, 刺兵器로서, 이 무렵 防禦具의 발달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무렵 대외 교섭의 주체는 백제를 제외하고 생각하기 어려워 중서부지역 마구의 출현은 철모 형태 변화와 함께 백제로의 전환과정을 보여주는 주요한 증거로 간주될 수 있다. 3단계는 4세기 중후반대 이후로서, 무기 및 군사 편제에 있어 보다 근본적인 변화가 관찰된다. 무기 및 마구체계의 발달과 병종의 분화 그리고 이 무렵 청주 신봉동고분군의 武裝的 성격이 강한 점을 염두에 두면 《三國史記》근초고왕 24년(369)조의 ‘漢水以南에서 크게 閱兵하였는데 모두 황색기치를 사용하였다’는 기록은 아마도 이 무렵 백제가 영역적 지배력 속에 중서부 지역 집단에 대한 보다 광역적인 군사적 통합을 이룬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백제가 이 무렵 원거리 대외 정복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러한 무기체계와 군사편제의 변화가 그 바탕이 되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연구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