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말기 익산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고 있을 뿐 통일된 의견을 도출하지 못하고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고고학적 성과를 바탕으로 분석하고 유추해나갈 수 밖에 없다. 현존하고 있는 유적을 통해 볼 때 금마저가 백제시대 王都로서 기능되어졌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지금까지 조사된 바에 의하면 아직까지 국가 경영을 하기 위한 행정 조직을 갖춘 도시 건물지나 나성과 같은 확실한 방어시설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단지 금마저궁 안에 있는 대관사는 궁장 내부의 핵심적 위치에 조성되어지며, 이를 중심으로 제석사와 미륵사라고 하는 삼세기원사찰을 두었다고 하는 점은 전통적 방식의 국가 제의가 불교화이며, 고대 사회에 있어서 국가경영의 한 축이라고 할 수 있는 국가 제의를 불교적으로 수행하고자 했던 종교적 기능을 담당했던 왕도로 판단되며, 호국불교적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백제왕권의 정통성을 보여주고 왕실과 국가의 번영과 발전의 영속을 기원하고자 하는 의중에서 대관사를 중심으로 전통국가의 宗廟와 社稷的인 기능을 금마저의 3대사찰들이 담당하였던 것으로 사료된다.
금마저의 3대 사찰에서는 1탑1금당의 가람배치를 기본으로 하고 원을 성하고 있다. 제석사지에서는 백제시대 전통적인 모습인 1원중문식으로 만들어졌지만 대관사지는 1원배례루식, 미륵사지는 3원병치식의 독특한 모습으로 가람배치에서도 독창성을 보여주고 있다.
금마저는 우리 전통문화의 원류였으며, 우리 전통문화의 근간을 형성해 왔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맺음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