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천은 용인 구성지역에서 원하여 수지-분당-판교-성남을 거쳐 서울 강남으로 유입되는 하천으로, 삼국시대 ~ 현재까지 서울에서 남쪽지방으로 가는 육상교통로로 이용되었다. 현재까지 발굴조사된 탄천유역의 한성백제기 유적은 10여 곳에 이르는데, 판교지역과 수지-구성지역 등에서 다양한 유적이 확인되어 도성 주변 지역의 경관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게 되었다. 주거 형태와 유물의 편년으로 보아 4∼5세기경 도성 주변의 지역상을 보여주며, 전반적으로 중앙의 문화를 따르나 일부 무덤의 형태나 토기의 양식에서 지역적인 특징을 나타낸다. 탄천유역의 주거문화는 중도식 주거문화권의 전통을 이어오다 육각형, 방형계주거지가 공존하면서 소형의 방형주거지가 유행하는 양상이다. 무덤은 원삼국시대의 묘제인 주구토광묘가 5세기 전반까지 지속되는데, 토광묘(단순목관묘)와 횡혈식석실분도 조성되며 여러 묘제 채용이 확인된다. 또한 마북동 일대의 유적군이 위치한 용인 구성지역에는 다양한 유적이 발굴되어 5세기 무렵 한성백제기 지역문화를 밝히는데 좋은 자료이다. 특히 원형수혈 64기가 밀집된 마북동 저장시설은 도성과 가장 가까운 물류 집산지로 밀접한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물 특징은 한성지역에서 사용하는 토기와 기종구성과 변화상 등에서 유사성을 보이며, 흑색마연토기와 조족문토기의 출토빈도가 높다. 그러나 탄천유역에는 5세기 이후 거의 소멸하는 격자문계 심발형토기가 한성백제 말기까지 줄곧 지속되고 있는 지역적 특징을 보이기도 한다. 용인 수지 풍덕천동 유적에서는 농공구를 중심으로 한 많은 양의 철제유물이 출토되었는데, 농경이 활성화된 탄천유역의 다른 취락에서는 철제농구가 많지 않은 것으로 보아 철기의 수리와 재가공을 담당한 집단이 풍덕천동에 거주했던 것으로 추론하였다. 한편 토광묘와 주구토광묘 등 무덤에서는 한성지역(석촌동 고분군)과 유물조합이 유사하며, 판교동 횡혈식석실분에서는 금제이식과 은제 팔찌, 뒤꽂이, 반지 등 착장형장신구가 출토되었다.
도성에서 남쪽으로 가기 위한 육상교통로로 4세기 후반부터 중요해졌다. 남방 지배루트와 철의 확보를 위해 도성이 직접 지배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5세기경에는 구성지역이 도성으로의 물류 공급 거점지가 되었다. 이후 탄천유역의 교통로는 주요 간선로로 백제 웅천 이후, 고구려, 신라에 의해 지속적으로 이용되었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