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지역을 중심으로 최근 조사된 분묘유적의 분석을 통하여 이 지역 정치세력의 전통성을 추출해 보고자 하였다.
백제 무왕은 그의 탄생과 성장 그리고 왕위에 오른 후 미륵사 창건 등 익산지역과 인연을 맺고 있다. 필자는 무왕이 정치적으로 성장하고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후원세력으로서 익산세력이 그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그와 관련된 설화의 무대 역시 익산지역을 본거지로 전개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또한 선화공주와의 대화 속에서 익산에 많은 금이 있다고 하는데 이는 이 지역의 풍부한 경제적 기반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삼국유사』에서는 무왕 부친을 용으로 묘사하여 출생에 대한 신비스러움을 더한다. 또한 『삼국사기』에도 무왕은 법왕의 아들로만 기록되어 있을 뿐 이다.
익산 지역 분묘의 정체성과 지속․복합양상을 통해서 볼 때, 익산세력의 배경에는 마한 전통의 세력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음이 확인된다. 금강하구지역에서는 5세기대에 들어와 분구묘에서 석축묘로 전환되지만, 미륵산 주변지역에서는 5세기까지 마한전통의 분구묘만이 축조된다. 그러나 7세기에 들어오면 금강하구유역에서는 웅진3식과 사비유형이 군집을 이루지 않고 산발적으로 축조되는 것에 비하여, 금마일원은 사비유형의 횡혈식석실분이 군집을 이루는 점을 볼 때, 정치적인 무게중심이 금강유역에서 금마지역으로 옮겨간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된다. 한편 『고려사』에서 금마군을 본래 마한국이라고 기록한 이후 후대의 많은 사서에서 마한과 관련지어 익산을 설명한다. 백제의 오기가 아니라 실제 역사인식에 근거한 기록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익산지역에 자리 잡고 있던 마한 전통세력이 무왕의 정치적 후원세력이 되어 그가 왕위에 오르는데 강력한 배후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 후 무왕은 익산으로 천도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백제 부흥의 꿈을 실현시키고자 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가 마한 전통세력에 의해 정치적 야망을 이뤘다는 고고학적 증거는 백제 고지에서 발견되는데, 마한 전통의 분규묘가 집중되었던 곳에서 나타나는 마한과 백제분묘의 복합양상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마한 전통이 가장 오랫동안 유지되었던 영산강유역의 복암리 3호분이나 신덕고분에서 사비유형의 백제 석실분이 분구묘 내에 전용옹관과 더불어 안치되고 있는 점도 주목된다. 7세기에 들어와서 백제고지 각지의 분묘양상이 마한 분묘와 복합양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무왕의 등극을 계기로 마한 전통세력은 정치적으로 힘을 가지고 되었고, 따라서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전통 마한문화가 부활한 것으로 추정된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