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횡혈식 묘제와 그 시원
III. 횡혈식 묘제의 전개현황
IV. 횡혈식 묘제의 연원
V. 맺음말
요약
본고는 한반도 고대사회의 주묘제로 활용되었던 횡혈식(橫穴式)의 연원을 살피고자 마련한 것이다. 이를 위하여 먼저 횡혈식은 어떤 묘제이고, 동아시아에서 이 묘제의 발생이 어디에서 언제 시작되며, 나아가 한반도에 시공간적으로 어떻게 전개되어 삼국의 묘제로 채택되었는가를 살펴보았다.
횡혈식 묘제는 장제적으로 이전의 단장묘(單葬墓) 대신에 합장(合葬) 혹은 다장(多葬)이 전제된 묘제로, 출입시설이 마련된 것을 가장 큰 특징으로 꼽는다. 이 묘제는 묘, 장제적으로 선행묘제인 수혈식(竪穴式) 묘제와 큰 차이가 있으며, 나아가 선행묘제의 진화보다는 3세기 혹은 4세기 대에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5세기말 혹은 6세기 무렵에 신라와 가야지역에 시간차를 두고 새롭게 등장한 묘제이다. 대체로 낙랑 대방지역을 필두로 4세기 이후로 한반도 전역으로 확산된 묘제이다.
중국의 전한(前漢) 중기에 부부합장(夫婦合葬)이란 장제의 변화에 부응하여 발생된 이 묘제는 처음에 목제 관곽(棺槨)의 사용이 기본이었으나 점차 전실분(塼室墳)으로 변화되고, 나아가 생전의 주거형상을 모방한 다실묘(多室墓)까지 발전된다. 이에 한반도 횡혈식 묘제는 중원(中原)의 횡혈식 묘제가 낙랑과 대방을 통해 유입되고 그것이 석실분(石室墳)으로 발전하였다고 보았다. 다만 고구려의 경우는 봉토석실분(封土石室憤)에서 그 시원을 구할 수 있지만, 적석총(積石塚)에 횡혈식 구조의 등장은 만주지역과 관련된 것인지, 봉토석실분의 확산에 의한 것인지의 판단은 유보된다. 반면에 백제는 서북한(西北韓) 지역에서 파급된 것이 비교적 선명하게 드러난다. 나아가 신라·가야는 고구려 혹은 백제에서의 2차 파급으로 늦게 횡혈식 묘제가 유입되는 것으로 확인하였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