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백제 각 시기 도성의 定都와 廢都 과정을 검토하였다. 한성기 도성은 하북위례성→하남위례성→한산․한성으로 이해되는데, 하북위례성의 위치는 확실치 않다. 하남위례성은 풍남토성으로 판단되며, 대략 2세기대에 등장한 것으로 보이는 환호취락이 백제 국가 성립기인 3세기 중후엽에 성벽취락으로 전환되었다. 거의 동시기에 몽촌토성도 축조되었으나, 왕의 거소로 사용된 시기는 근초고왕대인 371년 “移都漢山” 이후이다. 그 무렵 지명의 漢字化와 더불어 慰禮城은 漢城으로 표기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한성은 475년 함락 직전까지 풍납토성(北城 혹은 大城)과 몽촌토성(南城 혹은 王城)으로 구성된 양성 체제로 유지되다가 주민의 다수인 8,000여 명이 고구려 지역으로 遷徙되면서 도시적 기능이 상실되고, 그 가운데 몽촌토성은 고구려 군사의 거점으로 전환되었다. 그 무렵 고구려군은 금강유역 이남의 대전지역까지 남하하여 熊津으로 천도한 백제를 위협하였으며, 남한지역에서 지금까지 발견된 고구려 횡혈식석실묘가 분포하는 경기 남부 수원․용인~충북 충주 이북은 고구려의 지방으로 실질적인 지배가 이루어졌던 고고학적 근거로 이해된다.
한성 함락의 위급 상황을 맞아 웅진에 정도한 배경은 한성기에 이미 그곳에 군사 거점성이 마련되었고 王․候와 같은 지방 수장의 居官이 있었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지형적 한계로 인한 잦은 풍수해와 도시 공간의 부족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비로 천도하였다. 천도 이후 웅진은 5方 가운데 하나인 北方으로 전환되었다.
사비 신도성 조성 과정에 소요되는 工役과 신도성 거주 인구 확보를 위해 대량 武寧王 시기에 “內外遊食者歸農”등 일련의 조치가 취해졌으며, 그 가운데 車嶺 이북 한강 이남 주민들이 다수 포함되었다.
사비도성의 폐도는 660년 7월 당과 신라 연합군에 의해 도성이 함락되고 왕을 포함한 12,000여 명의 주민이 당으로 압송되면서 도시 기능이 소멸되었으나, 부소산성을 중심으로 한 사비도성 핵심지역은 백제 고지 지배를 위한 唐 熊津都督府 관부의 소재지로 전환되었다.
수부명 인각와의 “首府”에 대해 그간 구체적 검토 없이 백제가 그들의 都城을 自稱한 것으로 이해하였으나 이는 잘못이다. “首府”라는 단어 자체가 문헌이 등장하는 시점은 淸代 1697년에 판각된 『貴陽通志』에서이며, 지방의 최고 행정단위인 省 소재지, 자치주나 자치구의 정부 소재지, 속국이나 식민지 지배기구 소재지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부여 출토 수부명 인각와는 “首府”의 最古 용례로서 그 자체 동아시아적 중요성을 가진다. 수부명 인각와는 대당명 와당 등 당 웅진도독부 존속기간에 제작된 당계 와당과 공반되는 점이나 백제 인각와의 원형 印郭과 다른 장방형 인곽으로 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백제 멸망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 부여에서 집중 출토되고 있는 당 웅진도독부 관련 고고자료로 보면, 그간 고대사학계에서 통설로 여기고 있는 662년 웅진도독부 공주 移置說은 성립되지 않는다. (필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