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은 靑銅器時代 이래 한반도 중부 이남지역의 문화중심지의 하나였으며, 수로교통이 편리하고 또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한 곳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익산은 무왕에게 있어서 즉위 이전까지의 생활터전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세력근거지가 되는 곳이었다. 무왕은 자신의 의지를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지지세력으로서 익산에 기반한 세력을 친위세력으로 형성하고 미륵신앙을 통하여 민심을 수습하고 정치적 권위를 한층 높이고자 彌勒寺를 창건하게 되었다. 武王代에 대대적인 미륵사 창건공사가 진행됨에 따라서 이 지역의 많은 석공인들이 동원되어 우리나라 최초의 석탑이 축조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최초의 석등도 출현하게 되었다. 이러한 연유로 우리나라 석공예의 중심지는 익산이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익산이 석조예술의 메카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니라 이때부터 석공인의 인맥이 면면히 이어져 온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도 국보 제 11호 彌勒寺址 石塔을 비롯하여 王宮里 五層石塔, 蓮洞里石佛坐像, 古都里 石佛立像, 彌勒寺址 幢竿支柱, 胎峰寺 三尊石佛, 彌勒寺址 石燈 下臺石 등이 전해지고 있어서 이 지역에서 일찍부터 석조미술이 발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백제의 石造美術은 이 익산을 중심으로 발전되어 나갔다. 익산은 우수한 화강암의 산출지로서 전국에서 가장 잘 알려진 지역이고, 자연히 이 지역출신 석공인들은 우수한 석공예품들을 만들어 냈다. 그 동안 익산은 배출해 낸 수많은 훌륭한 석공인의 명맥은, 바로 신라의 다보탑과 석가탑을 축조하였다는 유명한 백제의 石匠人 阿斯達과 닿아 있다 하겠다. 이미 아사달 이전에도 신라의 호국사찰로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황룡사의 구층탑을 백제인인 阿非知가 축조한 바 있다. 이는 백제인들의 뛰어난 탑 축조기술이 이미 신라에까지 알려졌기 때문이다. 과거 1970년대 까지만 하여도 익산지역 출신의 석공들은 전국 각 지역에서 석공사를 전담하다시피 하였다. 이는 백제인으로서 신라에 들어가 목탑 및 석탑을 축조한 아비지와 아사달의 匠人精神이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음을 명확히 반증해 주는 것이다. 이에 기반 하여 익산지역은 오늘날까지 石造藝術文化의 중심지로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