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론
II. 금강유역 백제 토기의 형식
III. 영산강유역 백제 토기의 형식
IV. 기종을 통한 양 지역의 공통성과 특수성
V. 결론
요약
사비시대 백제토기를 일상생활용과 부장용으로 나누어 형식분류를 실시하고, 기종별로 나타난 공통성과 특수성에 대하여 살펴보았으며,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일상생활용의 범위는 금강유역과 영산강유역에서 상당한 차이점을 내포하는데, 그것은 중앙과 지방이라는 단어로 설명이 가능하다. 금강유역은 일상생활용이 상당한 발전을 이루고 고급토기가 등장하는 반면 영산강유역은 영성하다. 이는 백제 중앙정부와의 관계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부장용의 경우 금강유역에서는 단면 6각형 횡혈식석실분으로 보급이 이루어졌으며 토기의 매납은 금강유역내에서도 지역차가 있다. 금강유역 장제용 토기는 횡혈식석실분에서는 병과 개배 등으로 한정되며, 옹관묘로 사용된 대형호, 화장장골용기로 사용된 직구호가 포함된다. 또한 금강유역에서는 외반호, 자배기, 장고형기대가 일상생활용과 부장용 양쪽에 모두 쓰이는 현상이 사비시대에 나타났다. 영산강유역에서는 개배와 소형호로 한정되며, 화장장골용기는 말기까지 등장하지 않는다. 영산강유역에서 부장품으로 개배가 늦은 시기까지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은 영산강유역이 산지로 되어 나타난 현상이 아닌가 한다. 나주 지역에서 금․은제관식이 발견되어 백제 중앙정부의 통제하에 있었다는 것은 사실로 보아진다. 그리고 나주 복암리 3~7호분 출토 규두대도는 백제왕실 문양을 모방하여 만든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영산강유역에는 전방후원형 고분이 발견되면서 원통형토기와 같은 금강유역에서는 볼 수 없는 토기문화가 출현하며 영산강유역도 다른 지역과 교역을 하면서 발전하고 있어 지역적인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금강유역이나 영산강유역에서 사비시대가 되면서 웅진시대 부장용의 심볼인 광구장경호, 고배, 삼족토기, 고배형 기대가 급감하면서 소멸되고 있어 이러한 현상도 양 지역이 어떤 식으로든 국가의 통제하에 있었던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영산강유역에서는 금강유역의 상황과는 달리 사비시대가 되면서 곧바로 나타나는 현상은 아닌 것으로 생각되며 최소한 30-50년의 시기차를 두고 이루어진 현상으로 추측된다.
사비시대는 중국과의 문화교류에 의해 생활토기의 다양화 및 국제화가 정착된 시기이다. 중국도자기에 대한 모방품이 금강유역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나 영산강유역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영산강유역에서는 도자기를 모방한 토기에 대한 방제품은 만들어지고 있으나 도자기생산은 금강유역과 마찬가지로 이루어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사비시대 일상생활용이나 장제용의 소멸은 백제의 멸망과 때를 같이 한다고 생각되었으나 연기출토 비상을 참고해볼 때 백제계 문화가 7세기말까지 존재하고 있어 백제토기 또한 백제 유망민에 의해 약간 늦은 시기까지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