鉞은 일제시대 이후 최근에 이르기까지 삼국시대 유적의 고고학적 발굴조사를 통해 성곽, 고분, 지당 등에서 간헐적으로 출토되어 왔다. 그러나 出土量이 斧에 비해 월등히 적어 그 동안 큰 주목을 받지 못하였던 것도 사실이다. 심지어는 斧로 통칭되어 설명된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삼국시대이후 특히 조선시대에 이르면 鉞은 하나의 儀物(象徵物)로써 전쟁터뿐만 아니라 행렬(행차), 일식, 기우제 등 여러 용도로 사용되었음이 『朝鮮王朝實錄』을 통해 살필 수 있다. 따라서 본고는 여러 사서에 등장하는 鉞을 斧와 구별시켜 별도의 철기로 인식시키는데 그 목적이 있다.
鉞은 고구려 고분벽화에 묘사된 이후 다양한 변화를 거쳤다. 이는 조선시대 『세종실록』이나 『병기도설』에 표현된 鉞의 그림을 통해서도 쉽게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여러 유적에서 출토되었던 鉞은 전체 평면 형태에 있어 좌우대칭이 있는가 하면 좌우비대칭이 있고 刃部, 頭部(首部)의 형태도 각기 다양하다. 특히 인부와 동일 방향으로 뚫려 있는 銎部는 鉞의 중앙부뿐만 아니라 인부 혹은 頭部쪽으로 치우쳐 있음도 종종 확인된다. 공부의 평면은 장방형이 일반적이나 원형 혹은 장타원형도 살펴진다. 또한 鉞의 몸체가 공부에서 꺾이는 것도 확인되고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묘사된 4~5세기대의 鉞 은 대략 두 종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즉 안악3호분 및 약수리고분에 묘사된 鉞의 경우 중국의 斧 및 구의동, 아차산 4보루출토 鉞과 비교해 큰 차이가 없는 반면, 평양역전 2실묘에 묘사된 鉞의 경우는 중국의 靑銅鉞과 같이 頭部 쪽으로 몸체 하부의 段이 좁혀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중에서 후대에 이르기까지 백제 및 신라, 가야 등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鉞은 전자의 것이다. 따라서 鉞에서 확인되는 이러한 段의 유무가 계통이나 시기를 반영하는 것인지 아니면 용도상의 차이인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한편, 아차산 제 4보루출토 月形鉞은 異形으로써 다른 鉞들과 비교하여 형태상 많은 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월형월은 평면형태가 초승달과 같아 요즈음 도끼 모양의 鉞과 다르며, 刃部 및 공부의 위치·형태에 있어 보통 鉞과 구별되고 있다. 이러한 특이한 형태로 말미암아 월형월은 일반적인 병기나 행렬에 사용되었다고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따라서 이는 將軍이나 軍統帥權者가 소지하였던 兵權의 상징물로서의 鉞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고구려에서의 鉞은 行列이나 戰場 등에 주로 사용되었고, 戰場에서도 將軍이나 鈇鉞手와 같은 鉞의 소유신분에 따라 兵權의 象徵物(儀物 혹은 威信財) 및 兵器 등으로 구분되어 사용되었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현재 고고학적인 出土量으로 보아 鉞의 소지는 극히 제한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다양한 鉞의 性格은 고구려뿐만 아니라 백제, 신라, 가야 등도 마찬가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예컨대 3점의 鉞이 출토된 황남대총 北墳의 경우 男性 중심의 성격과 같은 鉞로 해석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른다. 왜냐하면 이는 신라왕의 부인이나 왕족의 여성 무덤으로 이해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삼국시대 鉞의 성격을 兵器나 兵權 등으로 단순하게 한정할 수 없고 이들 이외의 또 다른 성격이 있었음도 얼마든지 유추 가능하다. 결과적으로 이와 같은 사실들을 감안할 때 각각의 성격에 따른 鉞의 형식분류도 차후 재검토되어야 할 대상이라 생각한다.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안압지출토 鉞을 보면 삼국시대의 것과 비교해 부분적으로 그 형태가 완전히 변화되었음을 볼 수 있다. 즉, 전체 평면 형태에서 奇形이나 異形이 등장하는 점, 삼국시대 鉞의 공부가 대체로 신부 중앙 및 두부에 치우쳐 있는 것에 반해 인부쪽에 치우친 점, 그리고 두부의 폭이 현격하게 좁아진 점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다양한 鉞의 형태가 그 당시에 무엇을 의미하는지 현재로선 알 수 없다. 그러나 삼국시대의 鉞과 비교해 외관상 그 형태가 차이남은 분명하다. 따라서 각 시대에 따른 鉞의 형식분류가 요구되며, 그 특징 또한 검토되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나주 반남면 신촌리 9호분 甲棺에서도 鉞 1점이 출토되었다. 이 때는 백제의 지방통치가 완전히 실효를 거두지 못했던 시기였으므로 鉞을 소유한 피장자의 신분과 그 성격이 주목된다. 또한 이 鉞이 누구에 의해 하사되었는지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재까지 고고학적인 발굴조사를 통해 출토된 鉞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삼국은 많은 전쟁을 벌였고, 여기에 王命을 받은 장군들이나 부원수들이 참가하였음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현재 삼국시대의 유적에서 출토되는 鉞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극단적으로 환두대도를 비롯한 금제 장신구가 鉞 출토량보다 오히려 더 많은 실정이다. 이와 같이 삼국시대의 유적 특히 고분내에서 다른 철기류와 비교하여 鉞의 출토량이 적은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서는 『고려사』 列傳에서 그 해답을 찾아보아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시대에 鉞은 전쟁과 같은 특수한 경우에 한해 王으로부터 將軍에게 하사되었고, 장군은 부여된 임무를 마치고 나면 復命과 더불어 다시 그 鉞을 왕에게 되돌려주었다. 고려시대의 사실이지만 鉞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을 비추어 볼 때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내용이라 하겠다. 따라서 문헌상에는 나오지 않지만 현재 鉞의 출토량을 검토해 볼 때 삼국시대에도 고려시대와 같은 鉞의 수여관계가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고구려의 구의동유적이나 아차산 4보루와 같은 성곽유적에서 출토된 월의 수량을 참고하여 볼 때 軍制上 부월수가 刀나 鉾를 소지한 병사들에 비해 그 숫자가 매우 제한적이었음도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고분에서 출토된 鉞을 검토하여 볼 때 王에 의해 완전히 하사된 鉞 혹은 王 및 兵權의 所有者를 위해 생전에 사용하였던 鉞을 무덤에 부장한 예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이러한 차이는 고분의 피장자에 대한 신분이 어떻게 밝혀지냐에 따라 달라 질 수 있는 내용이므로 이에 대해선 차후 면밀한 검토가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鉞과 같이 전장에서 병기로 사용된 斧의 경우도 재검토 되어야할 대상이라 생각된다. 즉 고고학적 발굴조사를 통해 출토되는 斧는 제조방법이나 형태가 매우 다양하다. 이러한 다양성은 곧 기능적 측면(使用處)과 연결시켜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따라서 고분에서 출토되는 斧들을 공반 유물과 비교하여 이의 성격을 좀 더 세분하여 살펴볼 필요성이 있다. (필자 결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