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고대사회에 대한 인식
Ⅲ. 고대사회의 형성과 성격
1. 무덤의 변천과 고대사회의 형성
2. 고대사회의 성격
Ⅳ. 고대사회의 실체
Ⅴ. 맺음말
요약
영산강유역의 실체를 해석하는 시각은 다양하다고 볼 수 있다. 필자는 기본적으로 내부적인 관점에서 보고자 한다. 이러한 시각에서 본다면 영산강유역 고대사회의 실체는 어디까지나 재지세력에 의해 형성된 사회가 될 것이다. 그렇지만 영산강유역 고대사회의 실체를 고고학 자료가 아닌 문헌 자료에 근거하여야 한다면 4세기 후반 이후를 마한이라고 지칭할 수 없다. 이 보다는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후반까지 영산강유역의 실체를 新彌諸國으로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백제와의 관계를 살펴보면 전남지역은 4세기 후반에 일차적으로 백제의 영역에 포함된다. 이 시기 백제의 지방통치는 공납적 지배형태로 추정되지만 그러한 근거를 고고학 자료에서 찾기가 매우 어렵다. 다만 해남, 강진, 고흥 등해로상에 자리잡고 있는 세력은 백제와의 관계가 밀접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남해안지역의 세력은 백제와 일본이 교류하는 통로에 위치하므로 쉽게 백제의 영향을 받을 수 있었던 반면에 영산강유역에 자리잡았던 옹관고분사회, 즉 新彌諸國에 미치는 백제의 영향이 미미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475년 한성백제의 붕괴 이후에는 영산강유역에 대한 백제의 영향력은 극히 낮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498년 동성왕의 親征으로 백제는 영산강유역의 지배권을 확보한 것이 분명하다. 그 형태는 왕후제나 담로제 등이 주장되었지만 왕후제의 형태가 더 가능성이 있다. 또한 5세기 말경에 나타나는 전방후원형 고분의 존재는 498년 동성왕의 무력시위를 낳게 한 원인으로 생각된다. 이 때 백제가 지배권을 확보하였지만 6세기 중엽까지 영산강유역에서 백제의 문화 요소들이 본격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은 고고학 자료가 문헌기록보다 늦게 나타나는 하나의 현상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6세기 중엽경 오방제가 실시되면서 영산강유역은 백제의 지방으로 편입되었을 것이다. (필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