淸州 新鳳洞古墳群은 문헌이나 고고학적으로 백제 한성기의 실체를 거의 모르고 있던 1980년대에 百濟史 연구에 획기적인 자료였다. 이로 인해 신봉동고분군의 성격에 대해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논의가 이루어졌는데, 무엇보다 武器나 馬具의 출토에 주목하여 신봉동고분군 축조집단의 戰士集團說이 부각되었다. 또 加耶나 倭 등과 관련이 있는 유물들이 출토되어 그 國際的 성격이 논의되면서, 錦江流域을 기반으로 활동하였던 木氏와 관련시키는 설도 등장하게 되었다.
과거 신봉동고분군 축조집단을 戰士集團으로 결론내린 것은 초기 조사 상황이 가져다 준 일종의 착시현상에 가까웠던 것 같다. 고분군전체의 副葬樣相으로 볼 때 신봉동 축조집단 전체가 武裝한 것이 아니라, 中央과 마찬가지로 그들 가운데 戰鬪와 戰爭을 담당할 수 있는 일부 階層만 武裝한 것이며 이들이 地域의 支配層을 이루었던 것으로 새롭게 認識하였다. 문헌사에서 거론하는 것과 같은 첨魯制와 관련되어 있는지를 확언할 수는 없으나 백제 중앙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졌던 것만은 분명하다. 지역세력으로서 백제 중앙에 참여하여 귀족세력화되었을 가능성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한편 신봉동 축조집단 가운데는 加耶나 倭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관계는 청주지역이 갖고 있던 地政學的 중요성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이면에는 당시 백제 중앙이 가야나 왜와 밀접한 관계를 추구하였던 전략이 자리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피장자들은 백제 중앙과 가야-왜 사이 관계의 매개자적 역할을 하였던 것이 아닐까 싶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