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백제의 횡혈식 석실묘에 신라토기가 매납된 유적의 현황을 살피고 거기에 남겨진 석실묘의 구조내용을 검토하면서 신라토기가 매납된 정황적 배경을 이해하여 보고자 마련한 것이다. 아울러 백제 석실묘에서 신라토기가 출토될 수 있다는 전제의 마련과 함께 석실묘와 같은 분묘의 주체 인식은 유물만이 아니라 유구 등을 포괄적으로 검토하여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여 보고자 한 것이다.
백제 석실묘로서 특이하게 신라토기가 부장된 사례는 청주의 주성리 석실묘와 안성의 장원리 석실묘, 그리고 서울의 가락동 방이동 석실묘가 있다. 이들은 모두 백제 초기의 횡혈식 묘제유형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묘실 내에 신라토기가 남겨져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외에 백제묘제로서 한성도읍기로 편년될 수 있으면서 신라유물은 훨씬 늦은 6∼7세기대의 것으로 층위나 구조상으로 백제 횡혈식 석실묘를 재활용한 뚜렷한 흔적이 확인된다.
석실묘의 묘제특징은 출입시설을 마련하여 반복적으로 출입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나아가 묘실의 출입은 추가장에 보다 큰 목적이 있었기에 석실묘는 다장적 특징도 갖추고 있다. 백제사회에 횡혈식 석실묘의 등장은 상장례 중, 묘제가 기왕의 단장적 일회성 매장행위에서 다장적 반복적 매장행위로 전환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한국 고대사회는 삼국시대로 구분되듯이 여러 정치체가 정치적 역량을 갖추면서 각축을 이루었고, 때문에 남겨진 문화유산은 시간과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다. 횡혈식 석실묘는 삼국이 고대국가로 성장하면서 주묘제로 자리함에, 각각의 국가 성장의 정도에 따라 수용에 차이가 있고 나아가 사용주체에 따라 고유한 특성도 갖추게 된다.
한성에서 웅진으로 천도 즈음에 나타난 백제의 정치환경 변화는 기왕의 거점지역에 대한 변화가 수반될 수밖에 없었다. 반면에 6∼7세기대 신라의 비약적 발전은 점진적으로 백제 강역을 차지하면서 백제 고지에 방치된 석실묘의 재활용이 이루어지면서 백제 석실묘에 신라인의 재매장을 통해 신라토기가 부장품으로 남겨진 것으로 확인된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