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송산리 D지구 적석유구는 서울지역 백제 적석총의 전통을 이은 개로왕의 허묘 혹은 가묘로 보는 견해와 국가 제사와 관련된 시설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정확한 성격 파악을 위해서는 자세한 구조와 연대가 밝혀져야 한다. 구조에 있어서는 경사면을 수평으로 조성하기 위한 기단과 2∼3단 석축으로 구성된 피라미드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연대에 있어서는 출토된 삼족토기를 통해 6세기 1/4분기 전후경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한 송산리 D지구 적석유구는 송산리 A지구에서 조사된 석축유구와 축조수법뿐만 아니라 축조시기가 일치하기 때문에 두 유구의 상호 관계를 감안할 필요가 있으며, 중국이나 일본의 유사한 자료와 비교해 볼 필요도 있다.
중국 南京 鐘山의 남조 戒壇은 1호단과 2호단으로 구성되었는데 이는 공주 송산리에 두 유구가 공존하는 점과 상통하는 것으로서 남조 전축분이 백제에 수용되는 과정에서 함께 도입되어 송산리 고분군과 관련된 사찰의 일부를 이루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사찰은 송산리 적석유구보다 북쪽에 위치하여 陵寺 역할을 하였을 것이며 정지산에서 조사된 소탑 1기와 건물지 등이 이와 관련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공주 송산리 D지구 적석유구는 국내 의성, 안동, 문경 등지의 통일신라 특수 석탑 뿐 만 아니라 일본 나라시대 특수 석탑과도 상통한다. 따라서 중국 남조에서 백제로 도입된 후 국내 다른 지역과 일본으로 파급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 후 불감을 가진 영남지역의 특수 석탑들이 일본으로 재차 파급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일본 나라 頭塔의 초기 단계에 해당하는 기저부의 3층 土塔은 중국 남조에서 직접 파급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려우므로 일본으로의 파급 과정에 대해서는 보다 충분한 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