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김제 벽골제와 백제 중방성
1. 농업생산 중심의 벽골제
2. 유통거점의 백산성
3. 지방통치 중심의 고사부리성(고부구읍성)
Ⅲ. 맺음말
요약
전북지역에서는 1990년대 이후 많은 유적들의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이들유적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체계적인 연구가 이루어지기 보다는 개별 유적에 대한 서술적수준에 머물러 온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고고학적 분석을 통해 전북지역의 고대사를 복원하려는 노력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라 할 것이다.
이 글은 이러한 취지에서 전통성과 보수성이 강한 분묘유적을 활용하여 각 지역별 문화양상을 간략히 파악하였다. 특히 김제 벽골제의 발굴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기존의 제설을 재검토하고, 인근 정읍 고사부리성, 부안 백산성의 최근 조사 성과와 연계하여 백제 지방통치의 중심이었던 중방성인 고사부리성의 설치 배경에 접근하고자 하였다.
동진강유역은 벽골제 중수비에 보이는 몽리 지역을 통해 정치·경제영역 설정이 가능한데 이곳에 벽골제와 백산성, 그리고 고사부리성(고부구읍성)이 배치되어 있다. 이들 유적은 백제 오방성 가운데 중방성인 고사부리성의 근간이 된다. 곧 벽골제는 생산유적으로서, 백산성은 유통의 거점으로서, 정치 중심은 고사부리성으로 비정될 수 있다. 벽골제는 문헌기록이나 1975년도 발굴조사 결과 초축이 330년에 해당한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기존의 연구에서는 한강유역의 풍납토성의 축조연대나 축조공법의 비교를 통해 백제중앙세력이 벽골제 축조 중심에 있는 것으로 파악되어 왔었다. 그러나 금번 발굴조사 결과에서는 제방의 축조법이 풍납토성의 축조공법보다는 마한 분구묘의 축조공법과 매우 유사함이 밝혀졌다. 따라서 벽골제 축조집단의 중심은 마한 분구묘 축조 전통을 가진 세력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특히 벽골제의 축조는 3·4세기 대에 호남 서해안 일대에서 급증하는 대규모취락과 깊은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백산성 조사결과 4중 환호로 둘러싸인 유구로 정상에서 많은 곡물과 3·4세기의 마한계 토기가 출토되었다. 또한 고사부리성 근처에 지사리나 운학리의 마한 분구묘가 군집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백제 중방성 고사부리성은 그 근간을 마한전통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필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