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한반도 통일 전후에 해당되는 신라토기에 대한 분석을 중심으로 그들이 백제 지역으로 유입되는 과정을 살펴 백제멸망이라는 역사적 사건과 물질문화의 전환 현상을 연결시켜 보려고 시도한 것이다.
백제 멸망시 물질문화 변동을 검토할 때, 중요한 것은 정복자측의 문물이 어떻게 백제 지역에 유입하게 되고 그 배경에 어떤 지배방식이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정복지에 대한 신라의 지배방식은 주로 문헌사적 관점에서 연구되었으나 고고자료를 통한 접근이 시도되기도 하였다. 청주 신봉동 1호분과 청주 주성리 1호분은 각각 백제시대 초축된 횡혈식석실분인데 추가장시 6세기 후반경으로 편년되는 신라토기가 부장되었다. 이는 원래 백제 영향권에 들어가 백제계 물질문화를 사용하던 지방집단이 신라 세력 확대와 더불어 그 영향권 밑에 들어가 신라계 물질문화를 택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두 국가간의 접경지대에는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소속국을 바꿀 수도 있는 지방집단들이 남아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를 가능케 하는 것도 신라의 정복, 통치방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백제지역에서의 신라계 유물의 출현은 정치적 영향력에 의해 물질문화를 전환시킨 강압적인 면이 있으면서도 정복집단에 괴멸적인 타격을 줄 정도로 파괴적인 것은 아니었다. 백제지역에 신라토기가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신라가 급격히 세력을 확대하는 6세기 중엽이후 단각고배단계부터이다. 이후 대부완, 장경병 중심의 인화문토기가 공주, 부여, 익산 등지에 거의 동 시기에 출현하는 것으로 보아 백제 멸망 이후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660년 국가로서의 백제 멸망이 즉시 물질문화의 전환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멸망 당초에는 주로 당군에 의한 구 백제 중앙지역 통치와 백제부흥군의 대대적 항전 때문에 신라 물질문화가 정착될 여지가 거의 없었다. 백제 중앙지역에 본격적으로 신라계 물질문화가 유입하기 시작한 것은 고구려 멸망 이후 나당 간의 전쟁에서 신라가 백제 고지를 차지한 이후라고 할 수 있겠다. (연구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