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序
II. 泗沘都城의 構造와 造成 過程
III. 王宮城의 初創 時點과 性格
IV. 結
요약
사비도성의 나성 평면형태는 북나성 0.9km. 동나성 5.4km로 구성된 총연장 6.3km의 반월형으로서 백마강과 면한 서쪽에는 나성이 없음이 확인되었다.
도로유구 등 최근까지 고고학조사를 통해 알려진 자료들을 GPS 측량으로 종합해 본 결과 지금의 부여 시가지를 구성하고 있는 지역에는 세로 약 113m, 가로 약 95m 가량의 기본 구획으로 구획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사비도성은 나성 축조 이후 능산리 등의 외곽지점에는 처음 水田 등으로 활용되었다가 점차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도로의 개설과 함께 주거지로 변하였음을 확인하였다.
사비도성 축조는 웅진기의 5세기 4/4분기 무렵에 시작되어 적어도 천도 시점인 538년에는 완성되었으며, 그 축조 과정에는 고구려로부터 수복한 지역의 주민들이 많이 참여하였을 뿐 아니라 완공 이후 주민 구성에 있어서도 그 비중이 높았을 것으로 보인다.
익산 왕궁리 유적은 성의 평면 형태나 높은 규격성으로 보아 궁성이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 경우 사비도성의 정궁에 대응되는 離宮으로 이해할 수 있다.
왕궁리 유적의 초창기 시설에 해당되는 이궁은 출토 중국 청자 蓮花樽의 시기로 보아 6세기 중후엽에 비정될 수 있는데 이후 무왕대 말기인 7세기 전반경에는 중수 또는 확대 정비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익산 쌍릉이 무왕 및 그의 왕비의 능으로 이해되므로 그 무렵에 들어 이궁은 왕릉을 위한 사원으로 개축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