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2. 익산 천도의 사실
3. 익산 천도의 형태
4. 왕궁리유적에서 보이는 왕궁의 특징
5. 유물의 검토
6. 익산경영 시기
7. 왕궁리유적의 변화
8. 사찰로 기능 변화의 의미
9. 맺음말
요약
백제말기 익산경영과 관련하여 천도(遷都)와 별도(別都)중 하나만을 선택하였기 때문에 유적과 기록, 유물을 통해 익산천도 사실을 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천도가 아닌 별도로 파악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 글에서는 이전과는 달리 왕궁리유적이 왕궁으로 운영되던 시기에는 익산천도가 이루어 졌으며, 사찰로 변한 후에는 별도로서 역할을 하였다고 보았다. 왕궁과 사찰, 산성, 왕릉 등 백제의 중요유적이 익산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 익산천도를 확인할 수 있으며, 익산 천도가 기록된「관세음응험기」의 정확성은 제석사지와 제석사지 폐기장의 발굴조사를 통해 입증 되었다. 익산 천도는 인정하지만 완전한 천도가 아닌 별도로 생각하는 의견도 있으나 당시 부여가 백제의 수도가 아니라는 사실은 익산 천도의 완전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왕궁리유적은 치밀한 계획에 의한 공간분할과 건물의 배치, 당시 최고 신분에서만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유물을 통해 백제시대의 왕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익산경영 시기는 대체로 무왕대로 생각하고 있지만 최근에는 법왕이나 위덕왕대로 올려보려는 의견도 있으며, 무왕 말기에는 다시 부여로 돌아갔을 것으로 보인다. 무왕이 익산쌍릉에 묻히게 되자 왕궁리유적은 무왕의 명복을 빌기 위한 원찰로 변하게 되고 의자왕이 무왕 능을 참배 과정에는 익산에서 숙박했을 것이다. 의자왕이 익산에 머물 수 있는 곳은 전에 왕궁으로 사용되었으며, 그가 살았던 왕궁리유적이 가장 적합한 곳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익산은 별도로 역할을 하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