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분주토기는 그 기원이 일본의 식륜에 있으며 한국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이후 단선적인 발전과정을 밟았을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러나 한국의 분주토기는 계통적으로 통A형, 통B형, 호형의 3가지로 구분되어 각각 다른 기원과 발전과정을 겪었으며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통A형은 5세기중엽~6세기초반 옹관고분에서 사용되었으며 일본 식륜에서 아이디어를 얻되 현지 요소가 가미됨으로서 독자적인 유형으로 발전하였다.
둘째, 통B형은 5세기말~6세기초반 일본식 장고분에서 사용되었으며 공반되는 분주목기와 함께 일본 식륜을 충실히 모방하였다.
셋째, 호형은 4세기말~5세기초 옹관고분에서 사용되기 시작하였으며 일본 식륜을 모방하여 성립된 다음 점차 발전하여 사용되다가 6세기 중엽경 일본으로 파급되었다.
이 세가지 계통의 분주토기는 백제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바 6세기초반까지 영산강유역권에서만 조사되고 있다는 사실은 그때까지 영산강유역을 중심으로한 마한 토착세력들이 백제와는 구분되는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와같은 관점에서 본다면 일본의 전방후원분을 충실히 따른 장고분들이 당시 이 지역의 중심지인 나주를 제외한 외곽지역에 1~2기씩 산재한다는 점과 그 고분의 주매장시설이 북구주지역과 상통하는 횡혈식석실이라는 점, 그리고 출토되는 통B형 분주토기, 분주목기와 함께 6세기중엽경부터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한다는 점 등에서 그 주인공은 대화정권의 통합이 가속화되는 상황에서 압박을 피해 마한으로 망명한 북구주지역의 세력자라고 본다.
한편 전통적인 옹관고분에 통A형과 호형의 분주토기를 사용한 마한의 세력자 가운데에는 6세기 중엽경 백제의 합병에 따라 그동안 교류하여 왔던 일본으로 망명한 집단도 있을 것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