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성 초기기록은 백제 성왕대에 수즙한 기사에서 비롯되지만 백제의 웅진천도의 역사적 상황, 동성옹대 축성기사내용으로 미루어 공산성의 조영은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하기 이전에 진행되었음을 추정하였다. 이후 공산성은 왕도의 중심성 역할을 수행하지만 지리적 이점, 요형으로서의 기능에 따라 끊임없는 군사적 거점의 역할을 지닌 채 유지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성곽도 백제의 시축시에는 토성이었으나 조선 초 석성으로 개축되었으며 명칭도 공주산성, 공산산성, 쌍수산성의 변천을 보인다.
성내 유적에서도 이같은 현상이 발견된다. 대부분 조선기 조영되었으나 발굴조사된 유적의 대부분이 백제~조선에 이르는 유적이 중층을 이룬다. 만아루지가 조선시대 건물지로 알려졌으나 백제대의 건물유지상에 중축의 현상을 발견할 수 있고 임류각지는 백제 건물지로 조사되었으나 임류각지상에는 고려,조선의 유적이 중층되어 있다. 이같은 중층구조는 공산성의 역사적 위치를 대변해준다.
최근까지 공산성내 발굴조사가 진행된 유적은 만아루지, 임류각지, 동문지, 장대지 등의 건물지와 성곽에 시설된 암문, 수구문 이외에 지당 등이 있지만 이들은 대체로 문헌이나 지도상의 표시를 중심으로 조사되어 충분한 조사라고 보기 어렵다. 그러나 이를 통해 공산성의 변화, 변천의 파악은 가능하며 성내 남은 미조서 유적 또한 적지 않다. 따라서 공산성내 유적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조사의 진행에 따라 실체구명이 가능해질 것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