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법천리, 화성리 유적에서 발견된 동진청자와 전 청주시출토품, 그리고 새로이 발굴조사된 석촌동고분군과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청자류를 중심으로 한 당시 백제 중앙의 지방통제방식의 일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법천리 화성리 고분은 연대가 비교적 확실한 동진제 청자가 발견되어 이를 기준으로 한성기 백제고분 및 토기의 편년 작업에 자주 이용되었지만 근초고왕 27년에 집착하여 이들 청자류를 372년 이후에 수입된 것으로 보거나 백제 국가성립시기를 4세기 중반 이후로 보는 편견에 빠져 동진물품의 유입경로에서 백제 중앙의 역할을 무시하는 오류를 범해왔다. 그런데 석촌동, 몽촌토성 등지에서 동진청자가 발견되어 지금까지의 견해가 부당함이 밝혀졌고 아울러 법천리, 화성리고분에 동진청자가 부장된 과정에서의 백제 중앙의 역할이 부각되었다. 이는 당시 백제중앙과 지방의 정치적 지배, 복속관계를 설명하는데 좋은 자료이다. 즉 4세기 전반~중반에 백제 중앙은 외국 수입 희귀품을 하사하여 지방세력에 대한 통제를 강화시켜 이탈을 방지하려 했고 주된 목적은 자국의 군사력이 북방과 남방에 집중되는 공백을 신라가 이용하여 침입해 오는 불상사에 대비하기 위함이었으리라 추정하였다. 이는 정비된 지방제도나 지방관의 파견이 아직 이루어지지 못한 과도기적 현상으로 당시 백제의 정치적 성장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본고의 이러한 추론은 매우 단편적이지만 당시 중앙과 지방의 정치적 역학관계가 구조적으로 설명돠려면 기존의 문헌자료에 대한 전반적인 검토와 재해석이 필요함은 물론이고 한성부근 이외의 지역에 분포하는 고분 및 성곽들을 유기적으로 연결시켜 각지에 퍼져있던 지방세력의 성장과정과 존재양태를 파악한 후 이러한 지역공동체가 남하해 오는 백제중앙세력에 의해 어떻게 분해되고 편입되어 나가는가 하는 점을 고고학적 자료를 통해서 분석해야 할 것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