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Ⅰ. 百濟건국 이전의 文物交流
Ⅱ. 漢城時代 百濟와 晋의 文物交流
Ⅲ. 熊津時代 이후의 百濟와 南朝文化
Ⅳ. 맺음말
요약
본고는 고고자료를 중심으로 3~4세기대 중국 강남지방과 한반도 중서남부지역과의 도자 문물교류를 살펴보고자 한 것이다.
한반도 중서남부지역에 국가 성립 이전부터 강남지방과의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 도씨검이다. 이는 춘추시대 후기부터 후한대까지 사용된 것이다. 평양, 익산, 광주, 완주, 함평, 충남 등지에서 발견되었는데 완주 상림리에서는 예외적으로 26점이 한꺼번에 발견된 바 있다. 이 지역의 주민집단이 도씨검 수입의 주도세력이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상림리 도씨검의 재질이나 형태면에서 중국제품을 모방했을 가능성도 있으나 한반도 중서남부 일대에서 도씨검이 자주 발견되는 것을 볼 때 밀접한 관련이 있었음이 부인되지 않는다.
한성시대 교류와 관련해서 근초고왕 27년 진과 교섭한 최초의 시기로 잡은 종래의 견해는 몽촌토성의 서진시대 전문자기편의 출토로 수정되어야 한다. 4세기에 접어들면서 전대에 비해 다량의 동진청자가 발견된다. 몽촌토성은 물론 원주 법천리, 천원 화성리, 전청주출천계호 등에서도 발견되었고 이들 물품은 당시 진과의 교역품인만큼 백제에 수입된 시기는 제작시기 혹은 중국에서 사용된 시기와 거의 차이가 없을 것이다.
웅진시대 이후 중국남조와 교섭한 대표적 증거로는 송산리 6호분과 무령왕릉 등의 전축분이 있다. 웅진시대 남조문화 교류의 특징은 이질적인 중국 묘제를 채택하고 진묘수나 매지권, 중국 자기류는 부장하면서 전통적인 백제식 토기류가 보이지 않는 다는 점에서 당시 남조 문화에 대한 백제 지배층의 정치적, 문화적 의존도를 감지할 수 있다. 이는 당시 정치적 문화적 위기를 극복하는 하나의 방편이었지만 이러한 외세의존적 경향은 그 기반이 위약하여 곧이어 다시 횡혈식석실분이 주된 묘제로 채용된 것이다.
하지만 사비시대 이후에도 여전히 남조문화가 영향을 미치는데 부여 일원에서 보이는 호자가 그 증거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