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기와는 지금까지 확실한 것으로는 공주시대 이후의 것 밖에는 알지 못했다. 문헌상에서는 毗有王 3년(429)에 기와 기사가 있고, 또한 백제초기의 사원은 침류왕 2년(385)에 한산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實例로서 확실한 것은 없었다. 그래서 小稿에는 그 한성시대의 기와로서 더 가능성이 높은 자료로서 석촌동 4호분의 기와를 받아봤다. 자료로는 발굴자료를 모두 보지 않았기 때문에 다소 부족하지만 軒丸瓦의 문양, 제작기법, 平瓦凹面의 繩目文 등 낙랑 기와와의 관련이 추측된다.
당시 백제의 상황에서 보면 造瓦技術이 들어 올 가능성이 있는 지역은 낙랑, 고구려, 중국으로 있다. 고구려는 현재 알려진 범위내에는 직접 관계가 없을 것이다. 낙랑은 지금까지 서술해 온 그대로이다. 문제는 중국이다. 당시 중국의 남조, 북조에서의 조와기술을 필자는 공부 부족 탓으로 알지 못한다. 낙랑기와와의 차이점은 다른 곳에서 들어온 영향에 의한 것인가? 아니면 백제에서 낙랑기와가 변화하고 완성 된 것인가? 또한 이 석촌동 4호분 기와는 현 시점에서는 공주시대의 기와와는 연결되지 않는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백제 한성시대의 기와에 대한 연구는 아직 대부분이 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확실한 자료가 적기 때문이다. 그러나 宮殿의 기와, 寺院의 기와 등 앞으로 발견된 가능성은 크다고 생각된다. 부족하지만, 小稿가 백제 한성시대의 기와 연구의 발판이 되길 바란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