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장에서는 정림사지에서 출토된 소조상의 출토상황을 검토한 다음 그 크기와 형태에 따라 분류하였다. 정림사지 서회랑지 이근의 기와구덩이에서는 다량의 기와편과 함께 中型․小型․情景型像 등 100여점의 소조상편이 출토되었으며, 금당지 주변에서도 大型의 塑造像 파편들이 수점 출토되었다. 기와구덩이에서 출토된 중형소상과 소형․정경소상들은 대부분 심하게 파괴되어 원래의 형태를 추정하는 데 한계가 있지만 중․소형의 佛頭나 佛身破片, 武士像이나 僧侶像 등의 인물상 및 裝館破片들이 함께 섞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출토상황에서 볼 때 이들 중․소형의 소조상편들은 원래 일정한 조합을 이루면서 어떠한 공간을 장엄하던 것이 의도적으로 폐기된 것으로 생각된다. Ⅲ장에서는 소조상의 제작기법을 분석하고 제작지를 추정하였다. 소조상의 제작기법을 보면 불순물이 거의 섞이지 않은 고운 태토를 이용하여 대부분 頭體別製式으로 제작하였다. 소형소상이나 정경소상들은 대부분 木質의 芯木을 사용하고 있다. 중형소상들은 갈대나 볏짚 또는 새끼를 감싼 각목을 골조로 하여 점토를 덧붙이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모든 소조상들은 흑색이나 백색, 자색 등으로 채색하였지만 황갈유가 시유된 佛頭도 발견된다. Ⅳ장에서는 소조상의 봉안장소와 원형을 추정하였다. 소조상의 봉안장소는 북위 洛陽永寜寺나 일본 法隆寺 塔內塑像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다만 금당지 주변애서 수습된 瓦製佛身破片등의 경우는 출토 위치와 제자기법, 크기를 감안할 때 목탑의 塔內塑像이라기보다는 금당에 봉안된 본존불이나 협시불의 파편일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창건기 목탑의 위치는 金正基의 주장처럼 오층석탑 하부에서 확인된 版築土層의 존재를 통해 현존 석탑 자리에 원래 목탑이 있었을 것으로 보았다. 오층석탑의 건립시기는 大唐平百濟國碑銘을 통해 볼 때 660년 백제 멸망을 하한으로 본다. 또한 미륵사지 석탑과의 양식적인 비교를 통해 이와 동시기이거나 약간 늦은 무왕대 후반이나 의자왕대전반의 어느 시기에 정림사지 석탑이 건립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정림사지에서 출토된 單瓣蓮花文 수막새를 보면 7세기 전반에서 중엽의 어느 시기에 정림사지에 큰 변화가 있었고 이때 목탑 대신 석탑이 건립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