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백제 웅진기 사비지역 와유적 현황
1. 평와 출토 유적
2. 와당 출토 유적
III. 백제 웅진기 사비지역 출토 와당 형식 및 편년
1. 원형돌기식
2. 판단첨형식
IV. 사비지역 웅진기 기와 출토 유적의 성격과 의미
V. 맺음말
요약
백제 성왕은 538년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하면서 국호를 南夫餘라 칭하였다. 요즈음도 그러하듯 한 나라의 수도를 옮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정치적인 이해관계를 예외로 한다 해도 천도 전에 갖추어야 할 왕성이나 나성, 그리고 왕궁 및 관서 등의 존재는 많은 인민들의 토목사업과 對 인민 홍보를 요구하였을 것이다. 현재까지 발굴조사 된 고고학 자료, 즉 기와(와당 포함)들을 검토해 볼 때 웅진기의 사비경영은 대체로 5세기 말~6세기 초경부터 시작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는 부여의 용정리 폐사지에서 검출된 북위(혹은 고구려) 계통의 와당을 통해서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유적인 부소산성, 관북리 추정왕궁지, 동남지유적, 구아리 전 천왕사지 등에서 출토된 대통명 인각와와 대통사지 동범 와당으로 보아 본격적인 천도 작업은 성왕 초기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그 입지는 현 부소산성을 비롯한 남쪽 구릉 일대와 서쪽으로 펼쳐진 舊衙里 및 東南里地域으로 살필 수 있다. 한편, 최근까지 조사가 이루어진 花枝山 및 錦城山 일대는 출토된 유물로 판단컨대 초기의 천도 중심지에서 제외되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웅진기의 사비경영과 관련된 건물 유적의 성격은 유적의 입지와 출토 유물 등을 검토해 볼 때 추정 왕궁지, 사지, 산성, 제의 유적 등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들은 모두 기와라는 건축 부재와 밀접한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써 전술한 『舊唐書』, 『新唐書』의 기록과도 무관치 않음을 엿볼 수 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