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박산향로의 형식
III. 박산향로의 양식변천
IV. 백제금동대향로의 양식적 위치
V. 맺음말
요약
본 논문에서는 중국 박산향로의 전개양상을 통해 상징적 의미와 기능 변화를 살펴보고, 이러한 흐름 속에서 백제금동대향로가 가지는 양식적 위치와 영향관계를 가늠해 보았다. 이를 통해 백제금동대향로가 제작된 시기를 추정하고, 남북조 박산향로와 구분되는 특징을 제시하였다.
중국에서 박산향로는 내세를 형상화했다. 이는 당시의 내세관과 함께 내세와 현실의 긴밀한 유대관계를 보여준다. 후한시기의 박산향로는 동제보다 도제가 많으며, 선계 표현이 이전보다 단순화한다. 이는 박산향로에 구현되던 내세관이 분묘 내부로 옮겨갔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승과 사후를 별개로 구분하는 후한시기의 내세인식은 현실과 내세가 동일한 시공에 존재할 수 있다고 믿은 전한시기의 내세인식과 분명히 다르며, 이는 신산과 대좌도상의 연결구조가 사라지고 신산표현만이 중시되는 변화를 통해 드러난다.
이후 삼국과 오호십육국을 거치면서 조형 수량이 줄어들지만 박산향로는 지속적으로 조형되었다. 남북조시대에 이르러 공양물이자 법구로 재등장한 박산향로는 불교와 도교 조상 속에 편입되어 인간의 기원을 신에게 전달하는 매개물이 되었다. 동시에 하계에 남은 중생에게까지 그 효험이 미치기를 바라는 쌍방향의 목적이 담겨 있었다. 이와 같은 변화는 내세에 이르고자 하는 지향점이 신산세계에서 도솔천이나 아미타정토로 옮겨갔으며, 수미산은 단지 불교의 세계관을 이해하는 공간으로 인식된 결과라고 생각된다. 한편 기형과 문양에 새로운 요소가 도입되어 연화문 장식이 곳곳에 배치되었다. 북위 중기에는 화염이, 북제-북주시기에는 화염보주가 신산세계를 대체하는 경향이 보이며, 기형 자체가 연화문처럼 변형되는 모습도 보인다. 이 같은 변화에는 漢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독자적으로 해석한 북위의 정책적 노력과 함께 불교의 영향이 관여했을 것이다.
백제금동대향로는 산동지역의 북위-북제 계열 박산향로와 친연성을 보인다. 이는 산동지역을 중심으로 한 백제와 북조 사이의 문물교류가 이 향로의 제작배경이 되었음을 드러낸다. 그러나 포수문과 화염문으로 내세를 구획하고 그 안에 내세를 도해한 점은 동시기 중국 박산향로와 다른 부분으로 오히려 한대 박산향로와 맞닿아 있다. 이러한 차이는 금동대향로의 제작과 분향 목적이 왕실 주도로 선왕을 추모하고 정치적 안정과 권위를 확립하려는 데 있었기 때문으로 해석 된다. 요컨대 동시대 중국 박산향로가 불교적인 공양구로 기능한 것과 달리 왕실의 기물로써 제작되었던 것이다. 결국 금동대향로의 제작은 백제와 북제 사이의 사신교류가 이뤄지고, 아울러 남조와의 교류를 통해 얻은 한대 박산향로에 관한 다양한 문학적 표현이나 도안이 모델로서 제시된 6세기 후기에서 7세기 초기 정도에 이뤄졌다고 생각된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