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토기를 중심으로한 고대 한일관계 연구성과
III. 분주토기의 연구 성과
1. 분주토기의 분류와 변천
2. 분주토기의 발생배경
IV. 분주토기로 본 5-6세기 한일관계 일면
1. 분주토기의 일본 파급
2. 분주토기의 일본 파급의 의미
V. 맺음말
요약
삼국시대 한국 서남부지역에서는 세가지 유형의 분주토기들이 고분 장엄구로 사용되었다. 당시 서남부지역의 중심권을 이루고 있었던 나주 반남 일대의 대형 고분에서는 筒A形의 분주토기가 사용되었고 나주 반남 일대를 둘러싼 주변 지역의 토착계 중형 고분에서는 壺形의 분주토기가 사용되었으며 같은 주변지역이라도 일본과 관련된 장고분에서는 筒B形의 분주토기가 사용되었다.
한국 서남부지역에서 사용되었던 이 세가지 유형의 분주토기는 일본 北九州 지역과의 교류 속에서 壺A形, 筒A形, 筒B形의 순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6세기중엽경이 되면 세가지 분주토기 모두 현지에서는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하게 되지만 壺形과 筒A形 두가지 분주토기는 일본으로 파급되었는데 이는 현지 마한계 주민들의 일본 이주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마한계 주민의 일본 이주는 그 이전부터 백제의 영역 확장과 관련되어 간헐적으로 이루어져 온 바 있다. 3세기중엽 이후부터 백제에 밀리기 시작하였던 마한에서는 3세기 후엽경 아산만권을 중심으로 일본으로의 이주가 이루어졌으며 4세기중반경에는 충청 내륙지역과 전북지역을 중심으로 일본으로의 이주가 이루어졌다.
6세기중엽경에 나타나고 있는 壺形, 筒A形 분주토기의 일본 파급이 서남부지역 마한계 주민들의 일본 이주를 의미 한다는 것은 일본으로 파급되지 못하고 완전히 단절되는 筒B形 분주토기를 썼던 사람들의 성격을 살펴보면 보다 쉽게 이해된다. 筒B形이 사용되었던 장고분은 거시적으로 보면 大和政權의 일본열도 통합과정에서, 미시적으로 보면 磐井에 의해 北九州 지역이 통합되는 과정에서 밀리게 되었던 北九州 지역의 세력자가 그 주인공인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자신들의 망명지인 마지막 마한지역이 6세기중엽경 백제에 병합됨에 따라 더 이상 피할 곳이 없어지면서 장고분과 筒B形 분주토기를 쓸 수 없게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결론적으로 6세기중엽경 백제의 병합에 따라 서남부지역의 토착 마한세력 일부는 일본으로 망명하였고 나머지 주민들과 일본에서 망명하였던 세력들은 마지막 안식처를 백제에 복속되었다고 본다. (필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