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부여 왕흥사지에 대한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의 제8차 발굴조사 결과 靑銅函과 銀甁과 金甁의 3중 세트인 舍利具가 목탑지 심초석 舍利孔에서 발견되고, 그 주변에서는 장신구가 주류를 이루는 각종 사리공양품이 출토되었다. 사리구 靑銅函 겉면에서는 丁酉年 二月十五日에 百濟王昌이 亡王子를 위해 立刹에 즈음해 舍利 2枚를 묻었더니 신비로운 조화로 인해 사리가 3梅로 변했다는 내용이 확인된다. 이를 통해 王興寺가 창왕시대에 개창되었으며, 그 발원 주체가 창왕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는 언뜻 보아 王興寺라는 사찰이 法王 2년(600)에 기공되어 무왕 35년(634)에 완공, 낙성되었다는 문헌기록을 補正하는 듯하다.
하지만 이번 사리구 銘文은 백제왕창이 立刹했다고 했으며, 이는 塔의 心柱 혹은 刹柱를 세우는 행위를 말한다. 물론 立刹이 실질적인 사찰 건축의 시작이라 할 수 있으나, 이것만으로 왕흥사 창건에 대한 문헌기록이 ‘오류’를 빚었다고는 단정할 수 없다. 그보다는 오히려 이번 사리구 銘文과 기존 문헌기록을 총합하여, 왕흥사는 창왕이 개창을 시작했으나 무슨 이유로 중단되었다가 法王 시대에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되어 무왕시대에 완공을 보았다고 보는 편이 순리라 할 수 있다. 명문에 의하면 立刹을 거행한 날짜는 2월15일이라 했으며, 이는 불교계에선 석가탄신일과 연동된 중요 절기였다. 나아가 사리 2매를 안치했더니 3매가 되었다는 발상 또한 돈독한 불심에 호응하여 일어나는 神異로써 불교신학에서는 자주 거론된다. 심초석 주변에서 출토된 각종 유물을 鎭壇具로 간주하는 견해는 재고되어야 하며, 그것은 사리공양품으로 봐야 한다.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 불교신학에서 塔이란 바로 석가모니부처의 무덤이며, 舍利는 그 신체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필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