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Ⅰ. 유적의 위치 및 주변환경
Ⅱ. 발굴경과 및 유적의 층위
Ⅲ. 유구 및 유물
Ⅳ. 유적의 성격과 연대
맺음말
요약
서울대학교 발굴단은 주암댐 수몰지구유적조사의 일환으로 전남 승주) 대곡리에 위치한 집자리유적을 조사하였다. 무문토기시대에서 백제시대까지 이어지는 59기의 집자리 및 1기의 요지, 기타 소형유구 22기들에 대한 조사를 완료할 수 있었다.
우선 가장 시기적으로 이른 원형집자리는 평균면적이 33㎡로서 일반적인 소가족보다는 좀더 큰 규모의 확대가족이 거주했다고 볼 수 있다. 이들 원형집자리의 구조는 부여 송국리, 광주 송암동, 영암 장천리의 원형집자리와 상당히 흡사하여 이 시기에 있어서 다른 지역과는 달리 충남에서 전남해안지역에 결쳐 원형집자리가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집자리 형태라는 면에만 국한 시켜 볼 때, 이 지역을 하나로 묶을 수 있으며, 뒷날 마한제국의 성장과도 결부된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대곡리의 원형집자리는 극소수이긴 하지만 상한이 대개 서기전5∼3세기에 해당된다. 이들 원형집자리는 Ⅲ층(層)단계에서는 사라지고 새로 말각방형집자리가 성행하기 시작한다. 예외도 있지만 대부분이 한 변 2.5∼5m의 방형으로서 원형집자리에 비해 규모는 약간 작아지지만 유물의 종류와 양은 훨씬 증대되어 경제력의 성장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무문토기시대의 말각방형집자리는 이전 단계보다는 기원 이후의 원삼국시대 집자리들과 통하는 면이 많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원삼국시대 집자리는 무문토기시대의 말각방형집자리와 구조적인 측면에서는 잘 구분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출토유물면에서는 변화가 나타난다. 토기면에서 색조는 적갈색이나 회색, 문양은 격자문이나 승석문, 기형은 원저호ㆍ포탄형토기ㆍ시루ㆍ반각형파수부완, 광견호 등이 나타나지만 화덕에서 발견된 발형토기들은 무문토기시대 집자리의 노지에서 출토되는 발형토기와 기형상 전혀 구분이 안 된다. 게다가 3호 집자리의 철편(2점)이나 7호 집자리의 철촉을 보건대 원삼국시대에 철기가 보급된 것이 확실하긴 하나 주된 생활용구는 석기류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대곡리의 원삼국문화는 기본적으로 전단계의 무문토기 후기문화를 기반으로 새로이 전래되는 토기제작 및 야철기술을 받아들이며 발전했으며 문화발전의 후진성이나 지역적인 고립이 있었고 이러한 상태에서 4세기 이후 전남지역으로 들어오는 한강유역의 백제세력과 그 문화는 대곡리에도 파급되어 유적의 시대적 하한이 되는 4∼5세기 집자리에서는 이전 단계의 토기 양상이 변모하여 백제토기화하는 과정을 보여 준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