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녕왕릉은 512년 塼을 만들어 아마도 무령왕 당대에 유택을 미리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송산리 제6호분은 백제의 묘제 중에 사신도가 도입되는 최초의 묘제로 무령왕릉보다 후에 조성된 것이며 양과의 문물교류가 활발해진 시기인 성왕대 초기쯤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묘의 위치로 보아도 송산을 주산으로 하여 무령왕릉 다음에 조성된 것이며 전의 명문으로 보아도 양의 기술적 영향이 크게 작용하였다.
제6호분의 관대가 하나 밖에 없어 한 사람이 묻혔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 관대가 동쪽으로 있어 무령왕릉인 경우는 동쪽에 남향으로 왕의 시신이 있었던바 제6호분 관대도 남자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554년 성왕이 관산성에서 신라군의 급습을 받아 전사하였는데 그때 성왕은 목이 짤려져 머리 없는 시신만 장사지내게 되었던 것인바 성왕의 능지도 모르겠다. 이 시기가 되면 고구려 벽화고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본격적인 사신도가 그려지는 시기가 된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