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중국측에 대한 문화전파 영향이 거의 찾아지지 않는 것은 거의 一方的인 文化受容과정에 대한 추적이라 할 수 있다. 중국과 우리나라 上古時代의 西海交涉關係의 양상은 우리나라와 日本의 交涉關係에 적용되어 갔음을 찾아볼 수 있다.
考古學上으로 본 고대 韓·日關係는 新石器時代이후로 확실한데 일본 쓰시마섬, 고시다카(越高)유적에서 나오는 隆起文土器(B.C. 5천∼4천년경)는 B.C. 6000년경 우리나라의 양양鰲山里유적에서 나오는 융기문토기와 매우 비슷하다. 그 이후 우리나라 신석기시대의 표지적 유물인 빗살무늬토기는 일본 繩文土器時代의 소바타(曾畑)土器(B.C. 3천년경)와 비슷함을 보여준다. 曾畑土器는 신석기시대의 櫛文土器인들이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직접교역하거나 왕래를 통한 교류를 통해 繩文土器에 영향을 주어, 쓰시마섬(對馬島)·큐슈(九州)지방 등지에서 만들어졌을 것이다. 일본에서는 繩文時代後期에 나타나며 서로 같은 분포권을 갖는다. 櫛文土器時代 다음인 無文土器時代는 일본의 彌生時代에 해당되며 이때 韓半島에서 청동기, 無文土器, 쌀, 고인돌 등이 전파되고 있다. 《三國志》魏志東夷傳弁辰條·倭人傳 등을 통해 대략 서기전 3세기경을 전후 韓國·中國·日本간에 국제적인 활발한 교역관계가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
4세기~7기의 일본 고분시대에 있어서도 쓰시마와 큐슈에서 古墳時代초기에 다량의 金海土器와 伽倻土器가 나타나는 점, 竪穴계통 石室의 고분구조가 보이는 것들은 한반도, 특히 伽倻地方의 영향으로 보인다. 또 5세기경에 많이 나타나는 橫穴式石室古墳은 百濟前期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古代韓·日문화교류는 緊密하고도 積極的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韓·中交涉史를 문화전파의 일방통행이었다고만 하기에는 交易─貿易行爲의 문제를 너무 소홀히 다루었다고 할 수 있겠다.
역사시대 이래 우리나라와 중국의 교역은 朝貢을 통한 官邊主導의 公質易이 주였으나 대부분 사신을 통해 이루어지는 행위에서 화폐의 존재는 필요하지 않았을 듯하다. 한반도에서 출토되는 중국화폐들은 그 당시 동아시아 전체에 걸쳐 유통되는 일종의 국제화폐였을 것이다. 특히 存屬期間이 불과 10여 년밖에 안되는 王莽時代의 王莽錢의 존재는 그 당시 중국정세에의 재빠른 변동을 민감하게 반영하는 것이며, 한반도 전역에 걸쳐 五銖錢이 다량으로 나오고 있다는 사실도 역시 조공무역外에 민간차원의 무역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닐까 짐작된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