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사학계에서는 최근까지 대화정권이 4세기 후반에 한반도에 출병하여 신라와 백제를 굴복시키고 임나일본부를 두어 가야지방을 2세기간 지배했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해방 전에 형성된 식민사학관에 사로잡혀 임나일본부 설에 대한 우리나라 학자의 비판에 귀를 기울인 일본 학자는 없었으며 이에 관해서는 학문적 검토가 이미 끝난 것으로 처리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이용한 광개토왕비문은 변조설을 둘러싸고 논쟁이 있었으나 결국 말문을 닫게 되었다. 게다가 일본에서의 고대국가 형성시기를 6세기 후반으로 끌어내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임나일본부설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4세기 후반 출병과 임나일본부에 의한 가야 지방 지배설이 파탄되면서 5,6세기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을 귀화인으로 규정할 수 없게 된다. 이미 지적했듯이 그들은 개척자적 역할을 한 도래인이었던 것이며 특히 백제계 도래인들은 고대국가 형성에 기여한 사실들이 해명된다.
1963년 일본 아스카현 남쪽의 신택126호분에서 일본 고고학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사태가 발생하였다. 직경 20m 정도의 소규모 봉분에서 정교한 커트 글라스뿐만 아니라 1급 금제 이식 등이 출토되었다. 이로 인한 일본 학자들의 혼란은 1971년 무령왕릉 출토 유물로 인해 바로잡혔다. 신택126호분에서 나온 금제식판이 무령왕비 머리 가까이에서 출토된 것이다. 또한 청동제 초두도 나왔다. 그리고 목관을 이용한 묘제는 백제에 허다하며 이 고분이 자리한 곳이 백제계통의 동한씨가 거주한 고시군에 속해있다. 이같은 무령왕릉 출토 유물과의 대비를 통해 신택 고분은 백제에서 건너간 여성의 묘로 추정되었다. 백제계 도왜인의 자유로운 활동과 그들이 고국과 깊은 관계를 맺음을 시사하는 것이 바로 신택 고분인 것이다.
다음으로 살필 것은 5,6세기 삼국에서 건너간 사람들의 역할에 대한 재평가다. 5세기 후반 이후 파상적으로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계 정치집단이 고대국가 형성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소아일족의 활약에서도 보듯이 국가의 정치를 좌우하는 세력으로 존재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백제 멸망 후, 일본으로 건너간 귀실집사나 사택소명 등은 중앙 요직에 취임하였던 것이다. (연구원 요약)